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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when Dec 30. 2021

왜 사냐건 웃지요

오랜 친구를 만난 날

오랜만에 학교에서 친구를 만났다. 열한 시가 안 된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친구를 만나자 술이나 한 잔 하자는 버릇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것저것 해야 할 일도, 술을 그리 좋아하지 않게 된 최근의 기호도 별로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정기적으로 병원을 다니는 친구의 피곤한 얼굴을 마주하며 그 생각을 삼켰다. 검진을 받느라 속이 빈 친구는 카페에서 시킨 스프로 속을 채우고, 나는 그 앞에서 찬 커피를 천천히 마셨다.


그리고 연희관까지 천천히 함께 걸었다. 사느라 바빴던 탓인지 얼마간의 시간이 뻥 뚫려 입학했던 그 해 언저리와 지금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것만 같다는 친구의 말에 마흔이 너무 빨리 온 것은 아니냐며 시답지 않은 농을 던졌다. 그러나 내게도 무언가 공백이 만져지는 시간들이 있기에, 이십대였던 때에도 친구의 얼굴에서 언뜻언뜻 보였던 무거운 낯빛이 못 본 사이에 더 무거운 것을 달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에 냉기가 스미는 것 같기도 했다.


연희관을 돌아 천천히 정문을 향해 걸으면서 친구가 요즘 재밌어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육 개월을 했는데도 실력이 늘지 않는 골프 이야기였다. 복해서 붙여 넣는 것처럼 근래 많이 듣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캠퍼스에서 나누는 복사된 것 같은 이야기는 너무나 쉽게 새로운 것이 되었다.


이제는 덩그러니 혼자만 남은 것 같은 캠퍼스에서 일상적인, 너무나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과의 시간이 너무나 특별했다. 어느 시인이 왜사냐건 웃지요라고 쓴 이유를 어렴풋이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렴풋이 네가, 그래서 내가 있는 장면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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