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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when Feb 16. 2023

아침밥을 지으며

지난밤 잠이 푹 들지 못한 탓인지 피로가 몰려왔다. 그러나 새 날을 시작하려면 배를 든든하게 채워야 하기에 밥을 하고, 찬을 만들었다. 몸과 마음을 힘들게 만들었던 지난 관계의 서사가 지난밤으로 끝이 났다. 그래서 이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냉장고에 무엇이 있는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밥을 짓기 시작했다. 돼지고기를 넣고 뭇국을 끓였다. 어머니께서 이따금씩 끓이셨던 기억이 있어서 그 맛을 생각하며 만들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그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거친 맛이 느껴지는 어머니의 것과 달리 내가 끓인 국은 심심하기 그지없었다. 거침, 그 살아 있음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어머니께 한 번 여쭤볼 생각이다.


국에 넣은 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계산을 잘못해서 무 전체를 씻어버렸다. 크기가 작기도 해서 한 번에 다 먹어치우는 게 낫겠다 생각했다. 들깨가루가 있었다면 숙채를 해서 먹었겠지만, 채우지 못해서 빈 곳이 도처에 있는 집이기 때문에 있는 재료로 생채를 해 먹기로 했다. 채를 얇게 썰어서 설탕과 소금으로 잠시 재워뒀다가 고춧가루, 마늘, 파를 더해서 간단히 무쳤다. 멸치 액젓이 있었다면 좋았겠다 생각했지만, 그것도 없었다. 아쉬운 대로 참기름으로 향을 올렸다. 먹을만했다.


작은 찬기에 반찬을 덜어 뒀다. 집을 다시 채우면서 전자제품과 함께 그릇을 몇 가지 구입해 둔 것이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 먹기 위해서였다. 잘 먹는 일은 모양새를 갖추어 잘 차리는 일도 포함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릇을 몇 가지 먼저 사두었다. 잘한 일이다. 


자반고등어 한 마리를 구웠다. 라쿠진의 소형 그릴 기계가 있어서 거기에 구웠다. 팬 프라잉에 비해서 훨씬 수월하고, 맛도 있는 것 같다.



단출한 식탁을 마련했고, 부지런히 밥을 먹었다. 밥을 먹으며, 모든 행동에는 마음이 깃드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기껍게 누군가를 위해서 식탁을 차리고 함께 먹는 즐거움, 그것이 내게는 한동안 없었던 것 같다. 그런 마음을 받았던 적도 있었겠지만, 꽤 오랫동안 그 마음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나도 그런 마음을 품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눈치를 보며 마음을 쏟지 않는 날이 잦게 되었다. 마음을 주고받는 일이 무척이나 부자연스러웠다. 그렇기 때문에 관계가 끝난 것이 당연했다는 생각을 했다. 밥을 차리고 밥을 먹는 것, 그것이 결국 인간관계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잘 먹었다. 고민이 있지만, 잘 먹힌다. <멜로가 체질>이라는 드라마에서 진주(천우희 분)가 고민이 많다고 하니, 진주의 어머니가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 진주의 모습에서 고민이 그리 무거운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한다. 내 새끼 밥 먹는 모양을 보면 안다고 하면서. 지금 내가 잘 먹고 있는 것을 보면, 그리 힘든 상황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생활은 거짓말을 잘하지 않는 것 같다.


밥을 지어먹는 일이 쉽지 않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밥을 단순히 해 먹는 것이 아니라, 밥으로 삶을 일으키고 삶의 빈 곳을 채우며 인생을 지어 올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을 했다. 밥을 지으면서 삶의 기틀을 잡고, 인생을 쌓아 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밥을 지어먹는 일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고, 어려운 일이 되는 것이다. 그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결국 자신을 사랑하는 일의 시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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