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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when Apr 08. 2023

화양연화

코기토 에르고 줌

코로나 팬더믹이 시작되기 전에 얼굴을 봤던 친구를 아주 오래간만에 만났다. 한 아이의 아버지이던 친구는 그 사이에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됐다. 친구는 아이들을 키우느라 쉬이 시간을 내지 못했다. 나는 큰 변화를 겪었다. 그리고 그 변화에 적응해, 이제는 가끔 적적한 느낌을 받지만, 안정감 속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을 채우며 부지런히 살고 있다. 삶에 다시 찾아온 고요에 약간의 낯선 느낌과 함께 편안을 느끼고, 그리고 이제는 행복을 찾고 있었다. 그 많은 이야기들을 짧게라도 나누려고 금요일 낮에 잠시 만났다.


점심을 먹으며, 어울리지 않는 무거운 이야기들을 했다. 나누려는, 그동안의 이야기가 가볍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미 과거의 일이라 세세하게 말할 것도, 진지하게 분석할 것도 없는 일이 된 일들에 대해서 짧게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봄날 호숫가 주변에서 산책을 했다.


사는 일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했다. 관계에서 어려운 일을 겪고 나니 물러지고, 때로는 부수어지는 것이 모든 다른 것에 대한 신뢰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믿던 것이 믿을 수 없는 것이 된 후에 남는 생각은 “코기토 에르고 줌(Cogito ergo sum)”이 부정할 수 없는 진리라는, 굳어지는 믿음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데카르트가 철학을 세우기 위해 제 1 명제로 세웠던 그 유명한 말,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거의 유일하게 명징한 사실임을 믿음이 부서진 후에 알게 되었다고 친구에게 이야기했다.


믿었던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된 순간, 내 삶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가짜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허위로 가득 찬 것만 같은 불안한 날들을 보내며,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거짓의 것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삶의 모든 순간에 나는 생각하고 있다는 것 그것밖에 믿을 수 있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 나는 생각하는 나는 존재하고 있고, 존재하는 동안 살아내야 한다고 생각하며 쉽지 않은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다. 때로는 생각을 끊어낼 수 없는 시간들이 괴로웠다. 그러나 그 멈추지 않는 고통의 시간이 아이러니하게 삶의 의미를 다시 찾게 되는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다만,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생각하고, 생각하는 자신 말고 세상에 확실한 것이 있을까, 하는 회의가 짙게 남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더 진지해지지는 않았다. 대학원 생활을 함께 하며, 틈날 때마다 함께 공부하던 연희관에서 나눴던 한담의 끝 같이 힘든 것에 너털웃음을 붙였다. 그때 우리는 마음에 힘든 것들이 찌꺼기처럼 남더라도 웃음과 함께 덜어내려 했었다. 그것이 제법 효과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고, 힘든 일들을 가끔 그러한 방식으로 몸과 마음에서 덜어냈다. 오늘도 그것을 한 것이다.


친구를 만나기 전날인 목요일에는 춥더니 금요일은 산책이 즐거울 만큼 따뜻했다. 그래서일까, 길에 핀 꽃이 유난히 예뻤다. 물론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이야기가 특별한 말 없이도 윤기 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꽃을 보다 '화양연화'라는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화양연화는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가 내게 환한 미소를 짓는 시간도 아니고, 오래 바라던 모습을 스스로 이룬 시간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저 살면서 마주하는 고비를 하나씩 넘고 난 뒤에 잠시 쉴 때 불어오는 바람에 땀이 식는 그 순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매번 돋아오는 싹과 그 끝에 맺히는 꽃처럼 오고 가는 변화와 지속의 시간에서 잠시 만나는 반복된 순간이 다름 아니라 화양연화라고 일컬을 수 있는 시간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내게 좋은 시절일 수 있었던 날들이 힘든 고비를 맞아 부서졌다. 여전히 젊지만, 어쩌면 가장 싱그러운 젊음을 머금고 있었을 그 시간이 부수어지더니, 형체를 찾아볼 수 없게 증발되어 버렸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내 삶의 화양연화의 종말은 아닐 것 같다. 생각하는 나는 틀림없이 존재한다. 존재하는 것은 살아가는 것이고, 살아가다 보면 언제나 행복할 기회가 있다. 삶은 그래서 가치 있다. 다시 시작하고, 다시 행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언제나 무겁고 힘든 일이 찾아온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 시점이 화양연화를 맞이할 수 있는 기회의 시점 같다. 생각하고, 부지런히 살다 보면 반복해서 그 기회가 찾아온다. 내게도 여전히 화양연화가 남아있다는 것을 친구와 길을 걸으며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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