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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when Mar 19. 2023

목적과 자유.

흑맥주 한 병을 아주 길게 마신 날.

전혜린이 좋아했다는 흑맥주를 아주 오래간만에 마시는 술로 정해 딱 한 병만 마셨다. 보름쯤 술을 전혀 마시지 않았다.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의도적으로 술을 마시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괴롭지 않기 위해서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최승자 시인의 시구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건강상 이유로 술을 마시지 않기로 했었다. 그리고 정해진 시간을 채우고 다시 술을 마셔도 되게 되었다.


평소 좋아하지 않는 흑맥주를 선택했던 것은 노희경 작가님의 드라마 때문이다. 몇 번을 다시 보았던 <디어마이프렌즈>라는 드라마를 근래 다시 보았다. 전혜린을 좋아해 흑맥주를 좋아했고, 마음 편히 흑맥주 한 병을 마시기 위해 자유를 찾아 그간의 삶에서 떠난 정아(나문희 분)의 서사가 특별히 좋았다. 그래서 흑맥주를 마시고 싶었던 것 같다.


전혜린의 <목마른 계절>에서 그가 독일 유학 시절 좋아한 슈바빙 구에 대한 구절을 찾아 읽으며 술잔의 냉기가 가실 만큼 시간을 두고 맥주를 천천히 마셨다. 그는 슈바빙에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자유로운 생활이 무엇인지 배웠다고 했다.


"목적을 가진 생활, 그 일 때문이라면 내일 죽어도 좋다는 각오가 되어 있는 생활, 따라서 온갖 물질적인 것에서 해방되어 타인의 이목에 구애되지 않는 생활이 그것인 것이다."

                                                                    - 전혜린, "독일로 가는 길." <목마른 계절> 중에서


전혜린이 유학을 떠난 나이보다 훨씬 많은 나이에 이른 나지만, 나는 여전히 그가 만난 목적을 가진 삶을 사는 슈바빙의 사람들, 목적으로부터 얽매이지 않을 토대를 찾은 그들에 대한 기록이 여전히 좋았다. 목적과 자유 사이의 간극과 얽힘을 떠올리게 하는 내용이 언제나 흥미롭다. 아주 오래전에는 '목적'이란 말이 인간의 자유를 가로막는 말이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 목적마저 스스로 정하고, 그 목적을 위해서 종사하게 되는 인류사의 흐름 위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았던 1950, 60년대 한국사회에서 자라온 여성인 전혜린은 독일의 어느 지역에서 목적을 통해 자유를 배우게 되었다. 얼마나 극적인 변화인가.


글을 읽으며 자유에 대한 원숙한 서사는 없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됐다. 무엇도 나의 목적을 정해주지 않는 현대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언제나 마주하고 있는 존재론적인 불안(ontological anxiety) 위에서 자유를 찾으려는 마음은 새벽과 낮을 지나, 밤을 향하는 길목에서 마주하게 되는 낙조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근래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 공부가 길을 잃었다. 그러나 다시 목적을 중심에 두고 잃었던 길을 삶에 찾아 되돌려 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좋은 글, 좋은 서사는 언제나 힘이 세다. 제대로 살고 싶어 지게 만드는 것을 보면 말이다. 좋은 논문을 쓰는 것을 사는 목적으로 삼고 있다. 다만 좋은 서사를 담은 다른 글을 쓰고도 싶다. 잘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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