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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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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when Nov 11. 2023

도파민 중독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고요가 남루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1.

해가 돋기 한참 전에 일어나 어둠이 짙은 창밖을 보고는 한다. 이따금씩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멀리서 아련하게 들리기도 하고, 눈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서둘러 하루를 여는 분주한 사람들이 내는 소리가 제법 가까이에서 들리기도 한다. 새벽 네시 언저리의 이른 새벽이지만, 다른 집 창문에서 빛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계절과 날씨를 비롯한 바깥이 느껴지는 창가에서 한 발짝 물러나 두 겹으로 커튼을 친다. 고요한 새벽을 몰입의 시간으로 삼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가로등 불빛이 창과 커튼 사이의 틈으로 간신히 들어와 칠흑 같은 어둠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두 겹의 커튼으로는 한 겹의 옅은 빛의 선을 만들 수 있다. 그것으로 어둠 속 고요가 나의 하루와 함께 시작된다.



2.

새벽의 움직임들은 적막을 깬다. 그러나 귀 기울이지 않으면 소리들은 내게서 쉽게 사라진다. 그래서 대개 하루의 시작은 새벽의 고요와 함께이다. 


새벽부터 시작된 고요는 하루종일 이어지고는 한다. 바깥의 소리들이 내 주변을 채울 때에도 내가 직접 말 붙이고, 내게 말 붙이지 않는 대개의 시간은 소리로 가득 차는 것이 아니라 고요로 가득 차는 시간이 되기 때이다. 



3.

나는 한동안 그 고요의 시간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고요가 무기력과 불안을 몰고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악을 틀거나, OTT 서비스를 켜서 보고 있거나 새로 볼 영상을 켜두었다. 이따금 유튜브로 관심을 두는 주제에 대한 영상을 찾아 틀기도 했다. 


음악과 영상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소리를 끄면, 답답한 생각이 들거나, 어딘가 활기를 잃은 느낌이 들곤 했다. 한편, 인공의 소리를 끄고는 집중하지 못했다. 이것저것 해야만 한다고 부산스럽게 움직였지만 무엇 하나에도 초점을 맞추지 못했다. 그래서 인공의 소리들로 고요를 깨고서야 하루의 일과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하루 종일 휴대전화나, 컴퓨터를 켜두고 인공의 소리로 우울을 몰아내려고 했다. 



4. 

영국의 철학자 러셀(Bertrand Russell)은 <행복의 정복(Conquest of Happiness)>에서 현대의 부모들이 아이를 양육할 때, 영화 구경이나 맛있는 음식과 같은 수동적 오락거리를 너무 많이 제공하는 것에 대하여 문제 삼으면서, 계속된 자극을 원하게 만드는 수동적 오락거리가 행복한 삶에 긍정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삶에서 이룰 수 있는 유익한 성과는 결코 지루한 과정을 어느 정도 견디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가 일상적으로 반복하는 행동들은 내 삶에서, 러셀이 언급한 수동적 오락거리와 같이 내가 통과해야 할 지루한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 수반되는 고요를 견디기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한 편의 영화를 볼 때에도 서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며 클라이맥스로 향하는 다소 지루한 과정을 참고 보지 못했다. 문제의 성격과 발단에 대해 대체로 추론을 마치면 결론으로 가기 위해서 거듭해서 스킵 버튼을 눌렀다. 오직 더 강한 자극을 찾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결국 어느 날부터는 고요가 남루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 생활이 스스로 자극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자극이 없는 삶은 결국 죽은 것이고, 삶을 죽게 만든 나의 잘못을 찾아 삶을 비관하기 시작했다. 곧 자극을 채우지 못하면, 내 삶을 비관적으로 볼 이유들을 찾으며 부정적인 생각을 거듭해서 하고는 했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에는 이미 실패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5.

내게서 생겨나는 더 큰 자극에 대한 갈망과 갈망 실현의 좌절이 낳은 불안은, 근래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도파민 중독'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하고 얼마 전부터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맞다면, 건강한 삶을 위한 생활의 균형에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결국 내 생활이 '문제적인 것'이 되고, 결국 삶이 '문제적인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문제의식이 어느 날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다시 러셀의 <행복의 정복>으로 돌아가면, 러셀은 가벼운 흥밋거리나 오락에 빠진 젊은이의 마음에는 건설적인 목적이 들어서기 쉽지 않다고 지적한다. 늘 멀리 있는 목적보다는 눈앞의 즐거움에 관심이 쏠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러셀이 문제를 제기하는 즉각적이고 수동적인 오락에 빠지는 삶은 결코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고, 내가 선택하여 살고 있는 삶과도 거리가 먼 것이었다. 


삶의 방향을 달리 선택하지 않는다면, 자극에 기대어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6.

더 큰 자극을 원하게 만드는 것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멀리하기 위해서 절제하기 시작했다. 


소셜미디어, 유튜브 애플리케이션을 휴대전화에서 지웠다. 

OTT 사이트에 접속하는 것을 자제하고, 스킵버튼을 누르지 않기로 했다. 

자극이 큰 콘텐츠들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음악을 켜지 않기로 했다.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가급적 6시간 동안만 먹고, 18시간은 금식을 하는 간헐적 단식을 시작했다.


몸을 더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 자주 운동하기 시작했다. 

공연과 전시를 관람하기 위한 외출을 종종 했다. 더 깊이 생각하고, 메모를 하려고 노력했다. 

책을 더 가까이 하기 시작했다. 시를 더 많이 읽고 있다. 

외국어 공부를 하며, 막연하지만 여행을 하려는 생각을 키우고 있다.




7.

자극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며 몇 주를 보냈다. 


약간 심심하기 했지만, 그간 종종 하고는 했던, 어딘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는 부정적인 생각을 덜 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사람들이 나를 궁금해하지 않을까 봐 불안해지지 않게 되고 있다. 

위장의 불편감이 많이 줄었다.


아직 건설적 목적을 생활의 중심에 세우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점차 해야 하는 것들에 집중을 할 수 있게 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희망 같은 것들이 생긴다.


꽤 오랫동안 도파민에 중독되어 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도파민에 중독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 삶의 중심이 내게 있지 않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나를 채웠던 우울과 불안은 삶 그 자체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생활의 습관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점점 더 확신을 갖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나아질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됐다. 



그러므로 천천히 나아지기로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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