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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when Dec 03. 2023

의미를 찾는 중입니다.

"김환기, 점점화 1970-1974"를 보고

1.


"형태를 만들고 싶어 선을 기다리며 점을 하나씩 찍으며 살고 있다."


살아가는 일을 그렇게 정의 내리고는 합니다. 넓이도, 길이도 없어 존재를 물리적인 것으로 달리 설명하기 어려운 것 같지만, 위치를 표시할 수 있는, 그래서 알 수 없는 존재자인 점이 시작점은 아닐까, 하고 종종 생각하고는 하는 것입니다.


근래 삶의 단위가 될지도 모를 점이 어떻게 찍히는 것일까 의문을 갖게 되어 생각하고, 메모를 하며, 형태나 선과는 달리 질문을 던지지 않던 점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점에 대해서는 물을 것이 없었습니다. 목적이 꽤 명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살아가려던 방향과 달리 살아가게 되면서 의미를 다시 찾아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만한 단서들을 찾는 중에 점을 찍어 완성한 그림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점을 최소의 단위로 삼아 화폭을 채워 그림을 완성할 때 드러나는 점의 의미를 통해서 궁금증을 해결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김환기 화백의 점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이유였습니다.



2.


김환기 화백은 작품도 작품이지만, 배우자인 김향안 선생과 함께 찍은 사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것 같습니다. 소셜미디어에도 어렵지 않게 두 분의 사진을 보게 됩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이 그 사진으로 김환기 화백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얼마 전부터 조금씩 화백에 대해서 찾아보기 시작하며 작품세계에 대해서도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화백은 달항아리와 같은 한국적 요소들을 그림에 담다가 어느 시점부터 화풍을 바꿔 구체적 대상을 재현하기 위한 요소들을 화폭에서 배제한 후에 점을 전면에 배치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점으로 화백의 작품세계를 재구성하게 되면서 '점화'라는 말이 화백을 일컫는 중요한 말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난 9월부터 종로구에 있는 환기미술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점화 전시를 보았습니다. 12월 3일까지 전시가 이어지니, 마지막 날 하루 전에 전시를 보았습니다.


전시는 3층으로 된 공간 전체에서 이루어졌는데, 3층부터 이른 시기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방문한 시간과 때가 맞지 않아서 도슨트의 설명을 듣지는 못하였습니다. 도슨트 투어를 선호하지는 않지만, 추상화를 대하는 방식은 대상을 재현하는 그림들과는 달리, 작가의 세계를 이해해야만 적절한 방식으로 감상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도슨트의 설명을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도슨트 투어 대신에 설명을 녹음한 파일을 순서에 맞춰 들으며 처음 본 작품들을 천천히 감상했습니다. 그리고 화백에게 점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 가늠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1970년 1월 8일 김환기 화백은 자신의 작품이 공간의 세계이며, 서울을 떠올리며 오만가지 생각을 하면서 점을 찍어간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그 점을 통해서 세계를 구축한다고 기록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기존에 작품에 쓴 이미지들과 결별한 것이었습니다. 곧, 화백은 세계를 '공간'으로 규정하고, 이름조차 붙이지 않는 사회적 의미를 붙이기 이전에 존재하는, 어떤 근원적인 대상을 미술의 관점으로 모색하는 과정에서 점을 자기 세계의 구축을 위한 단위로 삼으며 세계를 재구성하였던 것 같습니다.


한편,  전시 설명에서 김환기 화백의 기록이라는 1970년 작품번호 140번이 성공적이지 않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화백은 세계의 창조의 의미를 평가할 기준을 갖고 있었고,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화백에게 성공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는지 너무나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성공의 의미를 찾을 단서를 그림만으로는 찾지 못했습니다. 고등학생일 때, 미술선생님께서 현대 미술을 읽는 독법 중 하나는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며 보는 것이라는 설명이 떠올랐습니다. 결국 의도는 작가가 구축한, 혹은 구축하려는 세계로부터 도출되는 행위의 의지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도를 읽으려면 작가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기에 현재로서는 김환기 화백의 그림을 저 스스로에게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점이 화백에게 세계 구성의 단위라는 것은 명백해 보였습니다. 다만,  점에 대한 그러한 해석만으로는 아주 특별한 것으로 화백이 점을 간주했을 것으로 받아들이기 기는 어려웠습니다. 점이 선을 이루고, 그것이 면을 이루는 것 이상의 의미를 찾아내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백은 점을 아주 특수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화백은 선보다는 점이 '개성적'이라고 규정하였기 때문에 점에 대한 특유한 의미의 영역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화백의 점을 화백의 의도에 따라 이해하려면 서울이 어떻게 화백에게 전유되었는지를 해석해 낼 수 있어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서울을 작품만으로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 화백에 대한 궁금증이 남았습니다.



3.


화백의 그림에서 점이 지니는 의미를 해석할 수는 없었지만,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삶에서 점이 지니는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단서 같은 것을 얻을 수는 있었습니다. 점 그 자체보다 점을 거듭해서 찍는 것이 얼마나 거대한 일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김환기 화백의 세계는 큰 화폭에 점을 찍는 방식으로 전개되었고, 화백은 점으로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홀로 거듭해서 점을 찍었습니다.


홀로 넓은 공간을 점으로 채워갔을 모습을 상상하며 화백이 구축한, 아직 나는 해석하지 못한 미지의 작품 속 세계에 대하여 동경하는 마음마저 생겼습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을 세계를 찾고 구현하는 과정에서 작은 수첩과 완성된 작품에 비해 너무나 작은 크기의 스케치를 지도로 하였을 뿐 달리 길이 정해지지 않았을 상상 속에 있으면서도 자신이 갈 넓은 세계에 닿을 길을 버리지 않는 선택의 매 순간들, 그리고 그것으로 구축한 작품에 대해여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4.


전시회에서 찾으려고 했던 '점'의 의미를 이해할 단서를 구체적으로 찾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점 하나가 가진 힘에 확신을 갖고, 그 넓은 화폭에 수많은 점을 꾸준하게 찍어갔을 작가의 모습을 떠올리며 너무나 끈기 없는 내 모습 그림 앞에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더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하루를 점으로 여기고 있지만, 앞으로는 더 잘게 쪼깬 무언가를 점으로 규정하여 삶을 구성할 필요가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김환기 화백의 서울과 같이 아련히 떠올라 의지를 갖게 하는 대상을 찾아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1974년 작고하기 3주 전까지 점을 찍으며 화폭을 채웠다고 합니다. 세계의 쉼 없이 창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점에 대해서 궁금증을 가진 이유는 존재를 갖기 위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존재를 구축하기 시작하는 단위가 공허하면, 형태를 갖추기 위한 성실한 작업이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김환기 작품의 작품을 보며, 지금 내게 빈 그 공간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타인의 세계를 보다 제 자신에게 적절한 방식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경로를 찾고 있습니다. 전시회를 보고 생각하는 일은 제게 좋은 방법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김환기 점화 전시는 제게 배운 것이 많은 전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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