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씩 소셜미디어에서 과거의 내가 남긴 기록들을 다시 보여주곤 한다. 기록에 담긴 2015년 10월 13일 오늘의 나는, 어딘가 잘못 꼬여버린 것 같은 삶을 두고 "왜 이 지경이 됐지?" 고개를 푹 숙이고 발 끝을 넘어 앞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내게 "왜 그래?"라고 물으며, 현재를 넘을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 후로도 어딘가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을 지우지 못했다. 그러나 씁쓸한 뒷맛이 사라지지 않는 과거에 묶여 오늘 새롭게 시작하지 못하며 살아갈 수는 없었다. 희망으로 쌓아 올리려던 언덕에 한참 못 미치는 높이에서 다시, 다시 내게 소리치며 시작하고 또 시작하며 조금씩 나아가려고 아등바등 힘쓰며 살아왔다.
그러나 결코 완성하지 못한, 희망의 서사에는 삶의 태도에 대한 확신의 느낌(confidence)이 담기지 못했다. 견고한 하나의 방식을 습관으로 반복하며 삶의 토대를 닦고, 그 위에서 더 나은 미래를 볼 수 있는 언덕을 쌓아 올리지 못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흔들릴 때마다, 움츠러들 때마다 "왜 그래?" 하며 나는 내게 묻곤 했다. 그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내가 결코 내가 정상상태라고 부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인식을 담고 있었다. 결국 오늘을 열심히 살아야지,라고 빠짐없이 다짐하며 계획대로 살지 못한 시간의 길이만큼 죄책감을 느끼며 사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2015년 오늘의 나도 비슷했던 모양이다. 그해 한강의 "괜찮아"라는 시를 읽고, 감상을 시집 한편에 짧게 기록해 두었다.
내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왜 그래"라고 묻는다. 나는 원하는 무엇인가를 위해 무감하게 종사해야 하는 사람인 것처럼 인식하고 내 행위가 만들어내는 기쁨으로부터, 감정 그 자체로부터 나를 스스로 소외시킨다. 모든 것은 "왜 그래"라는 비정상성에 대한 전체가 담긴 말로부터 시작된다. 소외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결국 "괜찮아"라는 자신에 대한 위로와 감싸기이다.
나는 내게 서슴없이 일상적으로 하는 "왜 그래"라는 말이 나를 내게서 소외시키는 말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 효율적이라고 할 수 없지만, 부지런하게 살고 있는 나 자신이 가진 문제를 짚어내며, 일상적인 좌절, 좌절이 남긴 얕지만, 성실하게 쌓이는 패배감이 왜냐고 묻는 습관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충분하지 않을지라도 나를 위해서 애쓰며 살아가고 있는 내가 나 자신을 존중하지 못하고 있던 현실의 문제를 한강의 시를 읽으며 바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왜그래,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
한강, "괜찮아" 중에서
이제 가끔은 "괜찮아"라고 내게 말해준다. 왜 그러냐고 여전히 묻지만, 아주 가끔은 결코 효율적이지 않은 내게 괜찮다고 말해주려고 애쓴다. 그러나 여전히 괜찮다는 말은 입에 잘 붙지 않고 있다.
여느 날처럼 새벽에 읽고, 읽고 나서 달렸다. 주말이어서 평소보다 조금 더 달려 10킬로미터를 달렸다. 부지런한 새벽이었다. 그러나 그 시작은 조금 각박했다. 오늘 새벽 눈을 뜨며 나는 어제 열심히 살았는지, 왜 그렇게 살았는지 물었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내게 주어진 삶을 허투루 쓰지 않으려고 종종 거리며 살고 있지만, 노력하는 나를 나는 홀대하곤 했고, 오늘 새벽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소셜미디어 기록에 적힌 그 시를 다시 꺼내 읽으며 그 불안과 불만 섞인 나에게 나는 여전히 연습 중인 말을 해주었다.
"괜찮아."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