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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완 Jun 12. 2022

네고, 그 불편한 협상의 시간.

내 돈도 아니고, 깎아도 나한테 뭐가 더 들어오는 것도 아닌데.

처음 ‘네고’라는 말을 접한 건 광고대행사 AE를 하던 때였다. 광고주에게서도, 사수에게서도, 제작팀에서도 수도 없이 들려오던 ‘네고’라는 단어. 견적을 깎아달라는 말을 할 때 쓰는 말로 영어 ‘Negotiation’ 에서 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얼마나 비웃었던지. 협상은, 무슨. 대부분의 네고는 일방적인 통보이다.


네고 좀 해주세요.



견적을 광고주에게 보내면, 한번에 통과되는 일은 절대 없다. 각자 회사의 사정이 있고, 산정된 예산이 있는 건 알지만 광고대행사의 수수료를 깎고(기본적으로 17.5%가 책정되어있지만 그대로 받아본 적은 한번도 없다), 인건비로 책정된 부분을 깎고(내 인건비부터 항상 깎인다), 여기서 깎고, 저기서 깎고. 많은 깎임을 당한 후에야 최종 견적이 완성된다. 그 몫은 당연히 광고대행사만이 부담하는게 아니라, 광고대행사와 같이 일하는 다른 중소업체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녹음실 비용 깎고, 편집실 비용 깎고 하면서 연쇄적인 작용을 한다. 이번에는 진짜 깎을 게 없다, 하는 견적 마저도 네고를 당하다보니 나중에는 깎일 것을 감안해서 차라리 높게 잡은 견적을 보냈다. 그건 나 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AE들과, 견적을 보내는 대행사들이 하는 짓이다.



그렇게 대행사 시절 많은 네고를 당하다보니, 내가 광고주가 되어서 네고를 해야하는 입장이 된 게 편하지 않았다. 게다가 광고 시장에 비해 영화 시장은 단가가 정말 낮게 책정되어있어서 내가 봤을 때는 더이상 깎을 것도 없어보였다. 처음 입사하고 예산과 단가표를 봤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광고업계가 허황된건지, 영화업계가 너무 심하게 후려치고 있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회사에는 이미 오랫동안 정해진 단가가 있고, 한정된 예산이 있다. 그렇게 네고 하는 광고주를 욕하던 내가, 네고를 해야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내가 네고를 ‘당할 때’ 가장 힘들었던 기분이 ‘내 일을 무시하는 느낌’ 이었다. 니가 정말 이 시간만큼 일했어? 난 니가 일한 가치가 이 정도 돈의 가치라고 생각하지 않아, 라고 말하는 듯한 견적 후려치기. 그 기분을 너무 잘 알기에 내가 네고를 하는 입장이 되니 더 조심스러웠다. 특히나 업계가 좁은 영화계에서는 단가, 견적에 관한 이야기는 더 조심스럽고 예민했다. 어휴, 그러려니 하고 받아주는 곳도 있고 매번 너무한 거 아니냐며 하소연을 하는 곳들도 있었다. 단가가 맞지 않으면 함께 작업을 안하면 된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경우들이 훨씬 많았다.


그 배우는 이 사람이랑 밖에 일 안하잖아.


감독이나 배우가 원하는 경우, 제작사 대표님이 원하는 경우 등 다양한 경우가 있지만 가장 흔한사례는 바로 ‘배우가 원해서’ 였다. 유명한 배우 중에는 본인이 원하는 스틸작가, 메이킹 감독과만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왕 사람을 꽂을 거면 단가도 협의해서 꽂아주면 좋겠는데 무조건 거기랑 해야한다는 말만 하고 단가는 나몰라라 한다. 업체도 본인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협의가 되지 않는다. 그럼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원하는 단가를 주면 되는 것 아닌가? 하겠지만 회사가 또 그렇게 녹록치않다. 안될 걸 뻔히 알면서도 네고를 해오라며, 한번 더 물어보라며, 이걸로는 회사 통과가 안된다며 나를 ‘네고시에이션’의 현장으로 내보낸다. 수많은 네고를 당하고, 수많은 네고를 해본 나의 경험으로 봤을 때 최고의 네고 방법은,



실장님, 제발 저 한번만 봐주세요...
그 단가로는 진짜 저 재경팀 컨펌 못받아요...


동정심을 유발하는 조르기이다. 물론 다음에 다른 계약을 하나 더 드리겠다던가, 별도의 조건 항목을 넣어서 조금 더 챙겨드릴 수 있도록 한다던가, 내년에는 꼭 올려드리겠다는 허황된 약속을 내세워서 협의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봤자 금액의 큰 차이는 없어서 결국에는 늘 조르기가 되었다. 업계가 워낙 좁고 투자배급사가 많지 않아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가끔 사람도 네고했다. 주로 무대인사와 같은 행사가 있는 날 경호업체와 몇명을 부를 건지에 대한 네고였다. 경호업체에서는 사람이 많이 몰릴 것을 대비하고, 효율적인 배치를 위해 많은 인력을 투여하고자 하고, 나는 최대한 줄이려고 한다. 배우가 적게 오니까, 이 배우는 인기가 좀 적으니까 등 다양한 이유를 들어 최소한의 인원만 올 수 있도록 네고를 하지만 결국은 경호인원의 인건비를 줄이기 위함이다. 안전과 비용 사이에서 늘 위태로운 줄다리기를 해야했다.



경호인원 뿐만 아니라 매니지먼트와도 자주 사람 네고를 했다. 특히 무대인사나 행사에 매니지먼트 인원이 몇명이 오는가가 늘 문제였다. 무대인사 버스는 보통 한대로 움직이는데 매니지먼트에서 너무 많은 사람이 오면 탈 자리가 없어지기도 하고, 지방이라도 가는 날에는 그 모든 인원의 숙박비와 식비를 다 계산해야했다. 그래서 지방 무대인사는 워낙 큰 돈이 들다보니 최소한의 인원으로만 오기를 요청하는데 꼭 그렇지 않은 매니지먼트들이 있었다.



우리 이 무대인사 때 단체복 입기로 하지 않았어요?
근데 스타일리스트가 왜 와요?
바지 주름 잡아줘야해서요


1박 2일 무대인사에서 홍보용 멘트가 적힌 단체 티셔츠를 입기로 결정했는데 굳이 스타일리스트가 따라오겠다고 한 적도 있었다. 맨투맨 티셔츠 밑에 입은 청바지의 주름을 잡아주기 위해서 1박2일을 따라오는 스타일리스트라 ... 조금의 흐트러짐도 용납할 수 없는 배우의 프로페셔널함이었을까, 매니지먼트의 프로페셔널함이었을까, 지금도 의문이다. 이런 식의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 네고도 흔한 일이었다.



네고 전화를 하고 나면 유독 기운이 많이 빠지고 허탈했다. 이걸 깎는다고 해서 내 월급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단가 잘 깎아오는 걸로 능력을 인정 받고 싶지도 않았다. 그게 능력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돈으로 그저 서로 기분만 상하는 느낌이 싫었다. 다른 회사로 또 이직을 할 생각이 없긴 했지만 만약 다른 회사를 간다면 예산이 정말 넉넉한 회사로 가고 싶었고, 지금도 가고 싶다. 1차로 견적 한번 받고, 이 정도면 충분하네 하고 바로 컨펌해줄 수 있는 그런 회사. 사람의 인건비를 우선으로 책정해주는 회사.



하지만 영화 투자배급사를 그만두고 결국 또 이직한 나는, 영화사보다도 더 단가가 낮고 예산이 1/100 로 줄어든 회사를 지금 다니고 있다. 내 팔자 내가 꼬는 거겠지. 오늘도 아쉬운 소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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