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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완 Jun 11. 2022

영화 좋아하세요?

그럼 이 업계로 들어오지 마세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나 무서운 영화, 잔인한 영화는 정말 더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내 의지로 본 처음이자 마지막 공포 영화는 ‘여고괴담1’이다. 그 이후로 내 인생에 공포영화란 도대체 왜 보는 지 이해할 수 없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내게 영화나 드라마같은 컨텐츠는 즐기려고, 재미있으려고 보는 것들이라 흔히 말하는 장르영화라는 것들은 거의 본 게 없었다. 하지만 일로 만난 영화는 내가 장르를 선택할 수 없었고,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영화들도 담당해야했다.


영화를 찍기 전 먼저 시나리오를 읽고 이 영화에 투자를 할 지, 말 지를 결정하는데 그렇게 들어온 시나리오들은 대체적으로 수위가 높다. 자극적이고 수위가 높아야 기억에 남기 때문일까, 실제 만들어지는 영화들보다 시나리오가 훨씬 잔인하다. 그런 시나리오들은 정말 읽어도 읽어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7년이나 다녔지만 여전히 나는 잔인한 장면이나 무서운 장면을 잘 보지 못한다.




-고 생각했는데, 나만의 착각이었나, 싶었던 적도 있다. 범죄 관련 영화가 만들어지면 15세로 가느냐, 19세로 가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15세로 받아서 대중성을 담보하고, 좀 더 많은 타깃을 대상으로 높은 흥행을 노리고 갈 것이냐, 19세 판정을 받아 매니아층을 타깃으로 하여 갈 것인가. 영화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은 15세를 받아 더 높은 흥행을 추구하곤 한다. 당시 나는 범죄 관련 영화를 2개 맡아서 하고 있었는데 한 영화는 19세 판정을, 한 영화는 15세 판정을 받았었다. 오히려 내가 봤을 땐 15세 판정을 받은 영화가 더 잔인하다고 생각했고, 심의실의 기준은 정말 여전히 알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친구들과 한참 하고 있었다.


19세 받은 영화는 어떤 장면이 있는데?
야한 장면은 하나도 없고,
생각보다 잔인한 장면도 없어.
그냥 패싸움 하는 장면 나오는 정도인데.
아, 숟가락으로 눈 파는 장면이랑,
컨테이너에 사람 갈아버리는 장면
나오긴 하는데 제대로 안나와.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당시 친구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도대체 뭔 *소리야 ...’ 라는 그 표정. 나도 말하다 깨달았다. 와, 엄청 잔인하잖아? 그런데 이게 15세라고 내가 인지하고 있다고? 내가 이렇게 변하다니, 이게 잔인하지 않다고 느끼다니, 정말 사람의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 두 개의 범죄 영화를 개봉하고 난 이후에는 다행히 잔인한 영화들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방심하고 있을 때 인생은 뒤통수를 치는 법. 잔인한 영화를 피했더니, 공포영화를 담당하게 되었다. 내 인생의 공포영화는 ‘여고괴담1’이 끝일 줄 알았는데, 무섭다 못해 고어*하기까지 한 공포영화 담당자가 된 것이다. 게다가 국내 영화도 아니라 잔인하고 고어물을 좋아하기로 소문 난 태국 영화였다. 첫 편집본 시사 날, 영화가 시작함과 동시에 밝은 해가 나오는 10분 정도만 보고, 그 이후로는 아예 후드티를 뒤집어 쓴 채 화면을 가리고 하단 자막 부분만 읽었다. 이건 영화를 봤다고도, 안봤다고도 할 수 없는 상태 ... 왜 내가 이 영화를 담당했을까,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 영화는 내가 정말로 제대로 보지도 못했기 때문에 공포영화에 대한 내성은 생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전히 나는 귀신만 나와도 무섭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좋아하는 밝은 영화, 코믹한 영화가 마케팅 하기 편한 것도 아니다. 웃기지 않은 코미디 영화를 담당할 때도 역시 막막하다. 내가 웃기지 않은데 어떻게 남에게 이게 웃기다며 설득하겠는가?


로맨틱 코미디를 담당할 때도 역시 불편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꼬시기 위해 던지는 말과 행동이 시대 착오적인 성희롱이라 분명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걸 로맨스라는 말로 포장해야했다. 이럴 때면 단순히 재미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내 개인의 가치관을 무너뜨리는 일이라, 정말 내가 사기꾼이 된 기분이다.


영화 좋아하세요?


그래서 가끔 영화 마케팅 취업 준비를 하는 친구들의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내가 면접 때 받은 질문을 똑같이 돌려주곤 했다. 하지만 의도와 설명은 전혀 다르다. 위에서 말한 것들처럼 이 업무를 하다보면 내가 좋아하는 장르만을 담당할 수도 없고, 안 좋은 영화를 담당하기도 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영화를 너무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이 좋아했던 영화들과 담당하는 영화의 괴리감에 힘들어하곤 한다. 그래서 오히려 나는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가볍게 보는 사람들이 더 이 업무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기대와 사랑이 크면 실망도 큰 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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