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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완 Jun 20. 2022

때로는 자괴감이 느껴지는, 의전의 나날.

저도 나름 귀한 집 딸인데요

의전. 내 인생에서 의전이란 단어는 별로 쓸 일이 없을 줄 알았다. 기껏 해봤자 광고회사 다닐 때는 클라이언트를 몇번 의전해봤고, 영화 투자배급사로 와서는 전혀 없을 줄 알았다. 회장님이 있긴 하지만 내가 자주 볼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내 인생과는 전혀 상관 없는 단어일 줄 알았는데, 이직하고 나서 내가 하는 모든 행사는 의전이 필요했다.



(영화계의 특성이기도 하고) 내가 다닌 회사의 특성이기도 한데 유독 술을 많이 마시며, 술자리를 완벽하게 배우와 감독의 취향에 맞춰 준비해야했으며, 그 의전이 너무 많은 일의 분량을 차지했다. 때로는 ‘그래 이 정도는 원활한 일의 진행을 위해 필요하지’ 라고 하는 것들이었고 대부분은 ‘꼭 이렇게까지 준비해야하나’ 하는 것들 이었다.



가장 많은 건 회식 장소 예약이었다. 보통 행사가 있으면 무조건 회식을 하는데 그 회식 장소 하나 잡는데도 너무나 많은 역경과 고난이 따랐다. 배우나 감독이 좋아하는 메뉴가 있는 룸이 있어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는 깔끔한 식당이나 술집을 찾아야 했고, 식당이 문을 열기 전에 행사가 끝난다면 식당에 미리 전화해서 오픈을 앞당기고 도착 시간에 맞춰 메뉴가 나오도록 미리 주문을 해놨어야 하며, 배우나 감독이 선호하는 주류가 그 식당에 없다면 따로 주문을 하던, 사와서 채워놓기까지 해야했다.




유독 한 종류의 맥주만 마시던 배우가 있었다. 하필 그날 가기로 한 술집에 그 맥주가 없어서 아이스박스를 술집에 미리 가져다놓고, 편의점에서 그 맥주를 사와 가득 채워 앞에 놓은 적도 있었다. 심지어 많이 마시기까지 해서 중간 중간 맥주가 떨어지면, 계속 나가서 사오고 채워넣어야했다. (아마 그는 내가 투자배급사 직원이 아니라 가게 종업원인 줄 알았겠지)


한 종류면 그나마 편했다. 배우 1은 와인을, 배우 2는 위스키를, 배우 3은 맥주를 좋아해서 3가지를 모두 다 보틀샵에서 사와서 셋팅해야할 때도 있었다. 회사에서 인터뷰나 행사가 있으면 회의실에서 술을 마시기도 했는데, 신입사원이 첫 출근 한 날 치킨 3마리와 맥주를 포장해오도록 시킨 적도 있었다. 첫 출근용 각 잡은 정장에 훈제향을 가득 품고 돌아간 그 아이의 집에서 부모님은 뭐라고 하셨을까.



이렇게 까지 해야한다고? 싶겠지만 해야했다. 나도 언제나 이해하지 못했고 불만이 가득했지만 도비는 힘이 없고 아무리 불만을 표해도 회사는 들어주지 않았다. 그나마 서울에서 벌어지는 회식 장소를 잡는 일은 수월한 편에 속했다. 자주 가는 곳들이 많아서 정해진 곳들이 있으니까. 한동안 내 핸드폰에는 삼성동 호프집 사장님, 논현 이자까야 사장님, 압구정 루프탑 사장님 전화번호가 다 저장되어있었다. 이렇게 지정된 한 곳이 아니라 무대인사처럼 움직이는 동선이나 지방에서 회식 장소를 찾아야 할 때는 정말 더 막막했다.



특히 무대인사는 여러 명이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하다보니 점심 식사와 간식의 종류와 타이밍이 중요했다. 극장을 돌아다니며 다니다보면 제때 먹을 수도 있고 못 먹을 수도 있는거 아닌가 싶겠지만 내 상사와 배우들은 아니었다. 무대인사 동선표에서 가장 중요한게 식사하고 넘어가는 타이밍이었고, 도시락의 종류였으며, 간식이 들어가는 시간이었다. 극장 동선 체크하고, 차 막히는 시간을 고려해서 넘어가고 무대인사 때 진행할 선물들을 준비하고 큐시트를 정리하는 와중에 간식이 들어갈 타이밍도 고려해야했다.


지금 선배님 과일 먹고 싶다는데, 어디 살만한 데 없나?


무대인사 버스는 뒷편을 개조해서 테이블을 놓고 앉을 수 있게 되어있는데 거기에는 배우와 감독, 팀장 이상 급들이 앉아있었다. 버스 안 외딴 그 곳에서 배우가 한마디 하면 바로 앞 좌석 나에게 카톡이 날아왔다. 과일 메뉴가 먹고 싶다는 배우의 한마디에 나는 무대인사 중간에 나가서 마트를 찾아가서, 포도를 사고, 화장실에서 씻어서 대접한 적도 있었다. 


어디 극장의 무슨 메뉴가 맛있더라, 대구 무슨 극장 근처 떡볶이 집이 맛있다더라, 등등 메뉴는 많고 다양했고 널리 널리도 퍼져있었다. 매니져들과 경호팀까지 다 합치면 매번 간식을 30인분 정도 사야했고 그 간식들을 다 사서 양 팔에 끼고 오면 근육이 마치 헬스장에서 운동한 듯 빵빵해져 있었다. (계속 이동을 하기 때문에 배달을 시키면 받는 타이밍이 애매해서 직접 사러가곤 했다) 




1차가 끊기기 전에 2차 장소를 예약하고 준비하고, 노래방을 가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주변을 엄청 뛰어다니며 지금 당장 들어갈 수 있는 노래방을 찾은 적도 있었다. 그냥 지도로 검색해서 갈 경우 사진과 다를 수도 있고 영업을 안할 수도 있고, 사람이 너무 많은 곳은 배우가 꺼려하기 때문에 무조건 직접 가서 확인해야했다. 그리고 제대로 확인되면 다시 원래 술자리로 돌아가 2차 장소나 노래방을 안내한다. 그런 회식에서는 당연히 술도 전혀 취하지 않았다. 마시고 싶지도 않을 뿐더러.



모든 배우가 그런 것도 아니고, 모든 회사가 그런 것도 아니며 유독 내가 다닌 회사가 다른 회사에 비해 의전 문화가 심했던 것이다. 그걸 영업력이라고 생각하는 회사였던지라. 실제로 얼마나 큰 영업력을 발휘했는지는 내 눈앞에서 펼쳐진 건 아니라서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바뀌어야 한다는 점이다. 간식을 사기 위해 여기저기를 뛰어다니고 양팔 가득 사와서 버스 뒷자리에 셋팅을 하고, 또 다 먹은 것들을 치우다보면 내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이직을 하면서 이제 그런 일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가장 기쁘기도 했고.


이제 나는 그 회사를 나왔지만 제발 그 의전 문화는 조금씩이라도 바뀌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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