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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완 Jun 24. 2022

라떼와 꼰대, 그럴 줄 알았지.

알았으면 미리 말 좀 해주지 그러셨어요  

모든 업계가 그렇겠지만 영화계 역시 꼰대와 라떼가 많다. 특히나 영화 한 편의 성공이 꽤 오랫동안 다음 투자금을 끌어오고, 한동안 비슷한 영화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때문에 큰 성공을 거둔 영화를 한 사람들 중에 유독 ‘라떼는’을 시전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배우나 감독의 뒷 이야기들이나 에피소드 들은 숨겨진 스토리를 듣는 느낌이라 재밌는 라떼도 많았다. 실제로 누가 캐스팅이 됐었는데, 그 때 당시에 감독과 배우가 싸웠는데 등등의 스토리는 꽤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문제는 라떼의 영광을 이야기하는데 그치지 않고, 지금 일에도 똑같이 적용하려 할 때이다.



대작을 경험한 사람일 수록 라떼 지수가 높아지는데, 내가 만난 한 제작사 대표님은 천만영화 경험자였다. 그는 나와 함께 하는 영화의 마케팅에 대해서 늘 ‘내가 그 영화를 해서 아는데 말이야’ ‘내가 그 영화를 할 때 이랬는데 말이야’ 라며 훈수를 두곤 했다. 특히나 포스터와 예고편에 있어서 레퍼런스로 자신의 천만 영화를 들이밀곤 했는데 문제는 그 천만 영화가 13년 전 영화라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한국 영화 포스터가 다 똑같다는 평가를 듣더라도 (사실 너무 억울하다) 13년 전 포스터와 똑같이 만들 수는 없었다. 그게 지금도 회자되는 좋은 포스터여도 따라할까 말까인데 촌스러운 포스터의 대명사라면? 나는 그의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수십가지의 시안을 만들며 설득했는데 결국 위에서 찍어 누르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만들고 보니 자기가 봐도 영 아니었는지, ‘내가 컷 셀렉을 잘 못했다는 이유로’ 그 포스터는 안쓰기로 했다.


“내가 재완씨보다 영화를 몇십년을 더 했어”


‘내가 다 해봐서 아는데’병은 나의 상사, 제작사 대표, 감독 뿐만 아니라 배우도 가지고 있었다. 연기에 대한 이야기면 그러려니 하고 듣기라도 할텐데, 연기가 아닌 마케팅 훈수를 두는 배우들도 종종 있었다. 대부분은 그냥 좀 마음에 안든다거나, 더 공격적으로(돈을 많이 써라) 해야하는 거 아니냐는 식의 의견이었으나 아예 마케팅의 전체 컨셉부터 흔드는 배우들도 있었다. 그가 나보다 영화계 경력이 수십년 더 오래되었고, 천만영화부터 신드롬을 일으킨 영화까지 경험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각자 자신이 맡은 일이 있는 거고, 같이 제작보고회를 하고 무대인사를 다녔다고 해서 마케팅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건데 마치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듯이 이 포스터는 이래선 안된다, 이 예고편으로는 관객의 시선을 끌 수 없다 등 계속 의견을 주곤 했다. 결국 그 의견들은 틀렸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그 말은 할 수가 없다. 영화 자체가 너무 재미없어서 마케팅이 맞았네 틀렸네를 말할 수도 없이 흥행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난 그 영화 실패할 줄 알았어


수많은 꼰대와 라떼들을 만나본 결과 ‘내가 해봐서 아는데’ 형의 꼰대보다 더 심각한 꼰대가 바로 ‘그럴 줄 알았어’ 형이다. 뭐든지 다 해봤고, 뭐든지 다 알고 있는 그런 상사. 실무 일을 하다보면 너무 바쁘게 처리하다가 놓치는 문제점이 있을 수도 있고, 실무 경험이 부족해서 놓치는 문제점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런 것들을 수많은 경험과 노하우에 의해서 미리 캐치했으면 실무의 잘못을 바로 잡고, 수정하도록 말해주면 되는데 논의 하고 보고 할 때는 대충 의견을 주다가 꼭 뭔가 잘못되면 그제서야 ‘난 그럴 줄 알았어’ 하며 방관하는 스타일.



특히 배우들과 홍보 스케쥴을 조율 할 때 최대한 그 배우의 성향에 맞춰 잘 맞을 거 같은 프로그램들을 제안한다. 준비한 프로그램이 다 거절당하면 “그 사람 원래 그래” 라고 하고, 그 중 하나라도 하기로 결정되면 “그거 한다고 할 줄 알았어” 라고 말하곤 했다. 또는 여러가지 포스터 시안을 보고할 때, ‘제작사에서는 이 포스터 시안을 선호했습니다’ 라고 대답하면 “역시 그 제작사, 이거 잡을 줄 알았어” 라고 하거나, 심지어는 회식 메뉴마저도 “난 그 배우 이거 좋아할 줄 알았어.” 라고 하곤 했다. (이 정도면 점을 치는 거 아닐까)



그나마 잘될 줄 알았어,는 괜찮았는데 안되고 나서도 그런 말을 할 때는 정말 표정 관리 하기가 힘들었다.


‘블라인드 시사회’ 라는 게 있다. 어떤 영화를 보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온 관객들이, 아직 미완성인 상태의 영화를 보고 평가를 하고 점수를 내는 시사회이다. 그 점수에 따라 편집 방향도 달라지고 개봉 여부도 달라지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점수에 예민하고, 시사회 모객을 어디서 하는지도 항상 큰 이슈이다. 모객 사이트에 따라서 모이는 사람들이 다르고, 스릴러나 공포처럼 장르영화일 수록 모이는 사람들의 성향에 따라서 점수가 많이 달라지기 때문에 예민한 부분이긴 했다. 하지만 모객할 수 있는 사이트가 많지 않아서 몇군데를 돌려서 하곤 했는데 우리의 예상보다 점수가 낮게 나오면 그 상사는 “이 사이트에서 모객하면 이 점수 나올 줄 알았어, 딴데서 했어야 하는데” 라고 하곤 했다. 그렇게 잘 아시면 미리 말 좀 해주시지?! 여기서 하지 말라고 하던가?! 아니, 애초에 이 점수 나올 줄 알았으면 그냥 알려주시지 뭐하러 이렇게 돈써서 사람 모으고 시사회 하고 점수를 내라고 하는 걸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수많은 경험과 경력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숫자로 모든 걸 판단할 수 없는 업계의 특성 상 경험과 촉은 굉장히 중요하다. 다만, 그 촉도 계속 갈고 닦고 배워야 날카로워지는 법. 과거의 영광에만 눌러앉아 말로만 한다면 그저 ‘내가 다 해봤는데 병’과 ‘내가 그럴 줄 알았는데 병’에 걸린 것에 불과하다. 어느덧 나도 12년차가 넘어가며 그 병들에 걸리지는 않을 지 늘 조심하고 있다. 특단의 조치로 회사 친구들에게 혹시라도 내가 “내가 그거 다 해봤는데~”라는 말을 꺼내기 시작하면 바로 싸대기를 때리며 정신을 차리게 해달라고 신신당부했는데 아직까지는 맞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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