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수길 와인바에서 만난 요리오 와인
술을 마시게 되고, 좋아하게 되면서 나는 점차 주종을 늘려갔다. 맥주와 소주만 알던 세상에서 좀 더 다양한 술들을 맛보고, 알고 싶어진 것이다. 가장 먼저 생각난 건 바로 '와인'이었다. 이제 돈도 벌겠다, 고가의 어른의 술 같은 이미지를 가진 와인의 세계를 알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와인의 세계에 들어가기도 전에 문턱에서 안좋은 추억을 쌓고 말았다.
요즘은 와인바도 가끔 가지만 사회 초년생 시절에만 해도 와인바는 내게 문턱이 높았다. 앞에서 말한것처럼 어른의 술같은 이미지도 있고, 뭔가 와인을 잘 알아야만 갈 수 있는 곳 같은 느낌이었다. 한번쯤은 가보고 싶지만 어떻게 가봐야할까 용기가 안나던 신입사원 시절 팀의 선배 대리가 먼저 내게 와인바를 가자고 제안했다.
그녀는 나와 같은 팀의 대리였고 유일한 여자선배였다. 같이 일을 하는 셀은 아니었지만 팀 내에 여자가 2명밖에 없고 그녀가 바로 내 윗 연차이다보니 자주 챙겨주곤 했다. 내 기준에 가끔 이해안되는 행동을 하기도 하는 사람이었지만 나는 신입사원이었고, 그녀가 나를 챙겨주고 알려주는 것이 많았기에 이해가 안되는 것들은 애써 무시하고 있던 찰나, 그녀가 술을 사주겠다고 했다.
여자로서, 선배로서 둘이서만 술을 먹자며 그녀가 나를 데려간 곳은 가로수길의 한 와인바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소개팅 성지로 유명한 와인바였는데, 분위기도 좋고 인테리어도 독특한 매력적인 곳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묻지 않고 알아서 시키겠다며 능숙하게 와인과 안주를 주문했다. 그때의 와인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데 바로 요리오였다. 신의 물방울에 나온 와인이라며 어찌나 아는척을 하며 시켰던지, 그때는 대리님 대단하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나도 이 와인을 좋아하겠다며 저장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가성비 와인으로 유명한 요리오로 그렇게 생색을 냈나 싶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와인바의 분위기는 좋았고, 와인도 맛있었으니까. 분위기에 취해가던 그때, 그녀가 약간 취한 말투로 내게 말을 했다.
"재완씨, 기분나빠하지말고 들어.
이건 여자로서 먼저 광고대행사 AE의 길을 걸어온 선배가 해주는 말들이야.
재완씨, 살 좀 빼. 여자 AE는 외모도 중요해."
사실 그녀는 회사 내에서 예쁘기로 유명했다. 광고주 사이에서도, 타 회사에도 예쁘다고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그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걸로 그녀를 판단한 적은 없었다. 일을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그녀가 하는 말들은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이게 지금 나보다 2살 많은 여자한테서 21세기에 내가 들을 말인가. 벙쪄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진짜 언니로서 하는 말이야.
한 5kg만 더 빼자. 그정도면 될 거 같아.
나는 55 혹은 66정도를 입는 평범한 사이즈이고 지금껏 살면서 단 한번도 뚱뚱하니까 살을 빼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저 말은 내가 진짜로 뚱뚱한 사이즈이더라도 절대 해서는 안되는 말이었다. 여자 AE는 외모도 중요하다니, 왜 스스로 자기 일과 능력을 깎아먹는 말을 하는 걸까. 하지만 나는 입사한지 한달 된 신입사원이었고, 그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어차피 이미 그녀는 많이 취해보였고 다음날이면 그런말을 한 걸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내 기분은 엉망이 되었고 그 전까지 너무나 멋져보였던 와인바와 신의 물방울에 나왔다던 와인은 꼴도 보기 싫어졌고 더이상 그 어떤 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정말 최악의 방점을 찍어주었는데, 취한 와중에 자기를 좋아하는 남자를 부른 것이다. 나에게는 다른 광고회사 선배를 소개시켜주겠다며 대뜸 그 남자를 불렀지만 갑자기 야밤에 와인바로 달려온 남자는 누가 봐도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남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고, 취한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려했지만 그녀는 혼자 홀랑 택시를 타고 가버렸다. 나와 그 남자만 두고.
총체적 난국, 최악의 상황에서 나와 그 남자도 바로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헤어졌고, 나는 한동안 와인바, 특히 요리오 와인은 꼴도 보기 싫어졌다. 그녀와는 아무렇지도 않게 회사에서 일하긴 했으나 최대한 사적으로는 대화를 나누지 않으려 노력했고,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신입사원이라 팀을 돌아다니며 배워서 금방 다른 팀으로 발령 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와 멀어지면서, 좋은 사람들과 좋은 와인을 마시면서 다시 와인이 좋아졌다. 특히나 요리오는 가성비 와인이라 몇번 사먹기도 했다.
술은 죄가 없다, 단지 마시는 사람이 늘 문제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