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멋에 빠져 오래가지 못한, 칵테일
술을 좋아하게 된 건, 좋은 사람들과 술을 마셨을 때 즐거운 분위기도 좋지만 '맛있기 때문에' 좋아한다. 더울 때 물 대신 마시는 탄산이 센 국내 라거맥주도 좋아하고, 홉향이 풍부하고 쥬시한 뉴잉은 정말 맛있어서 좋아한다. 담백한 막걸리도 좋아하고, 묵직하게 입안을 감싸는 레드와인도 가끔 먹으면 맛있다. 지금은 술의 맛을 느끼고 사람들과 토론을 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사실 어렸을 때는 맛보다는 느낌, 감성으로 술을 좋아했다. 그냥 분위기가 좋아서, 혹은 멋있어보여서 술을 좋아했고, 알고 싶어했다.
그 중 가장 허세 가득하게 좋아했던 술이 바로 '칵테일'이다. 소맥 에피소드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나는 사실 도수높은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13도가 넘어가는 술들은 알콜향만 너무 세고, 맛이 느껴지지 않아서 도대체 뭘 느껴야하는지 알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단 음료도 싫어한다. 막걸리 중에서 아스파탐이 과하게 들어가서 단맛이 심한 류는 좋아하지 않으며, 콜라, 사이다도 잘 마시지 않고 초코음료? 절대 먹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가 싫어하는 음료의 총 집합이 바로 칵테일인 셈인데, 내 취향도 제대로 모른 채 '칵테일 조주기능사' 시험을 도전했던 적이 있었다.
그 시작은 바로 '바텐더'라고 하는 일본 만화였다. 신의 물방울이 와인의 세계에 관한 만화라면, 바텐더는 칵테일과 Bar 문화에 관한 만화였다. 칵테일에 대한 정보도 당연히 들어있지만 일본 식음료 만화 특유의 과장이 심한 만화였는데, 예를 들면 그런거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의 발자국 소리에서부터 이 사람의 감정을 헤아리며, 그에게 지금 필요한 칵테일이 뭔지 파악하는, 천재 바텐더. 지금 보면 말도 안되는 에피소드들로 가득한 만화인데 27살 사회초년생이 보기에 그 만화는 멋과 감성, Feel이 충만한 만화였고 나는 그 만화에 나오는 것 같은 Bar를 찾기 위해 한창 칵테일바 문을 두드리며 다녔다.
하지만 당연히 현실에 그런 Bar는 없었고, 나는 '그렇다면 내가 만들어야겠다!!' 라는 이상한 쪽으로 결심이 생겼다. 그리고 위스키도 못마시고, 보드카도 못마시고 단 술은 더 싫어하는 내가 '칵테일 조주 기능사' 학원에 등록하고 시험을 준비하게 된 것이다. 바텐더가 되기 위해서 꼭 시험 자격증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칵테일의 다양한 종류와 베이스를 알기 위해서는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시험은 필기와 실기로 이루어져있고, 학원에서 두 가지 수업을 병행하며 나는 바로 내 문제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국가 공인 자격증이다보니 실기 시험도 정해진 레시피대로 만들어야해서 레시피를 달달 외워야하는데, 외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완성을 해도 이게 맛있는지 아닌지를 모르겠는거다! 열심히 만든 술인데, 이게 맛있는 지 아닌 지, 제대로 배합을 한건지를 모르는 아이러니. 게다가 도수 높은 술을 섞는 레시피 실습을 하면 아예 맛을 보지 않는 일도 허다했다. 멋있게 칵테일을 만들고 즐기며, 고독하게 바에 혼자 앉아있는 나를 상상했는데 맛도 보지 못하는 무지렁이라니.
그래도 돈 내고 수업도 들었고, 이왕 준비한 거 시험도 치러 갔었는데 필기는 만점으로 통과, 실기 시험은 ... 아예 치러가지 못했다. 당시 나는 광고대행사를 다니고 있었고, 실기시험을 신청한 날 회사에 일이 터져서 보러가지 못한 것이다. 그 이후에도 몇번의 실기시험 기회는 있었지만 술 자체에 크게 흥미가 없어서인지 결국 시험은 치지 못했다.
진짜 맛있게 먹고 반해서 빠진 게 아닌, 만화에 홀리고 겉멋만 가득했던 내 칵테일 사랑은 그렇게 학원 다니는 3개월만에 끝났다. 마치 외모만 보고 사랑에 빠졌다가 알고 보니 나와 공통점이 하나도 없는 남자를 만난 기분이랄까. 술도 남자도 겉과 분위기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된다. 직접 마셔보고, 많이 마셔보고, 나와 맞는 점을 찾아야한다. 그러니까 오늘도, 새로운 술 한잔을 마셔봐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