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취한 나는 유자이고, 술깬 나는 유자껍질이다.
한동안 제주에 푹 빠져 살았지만, 국내 여행을 제주로만 간 건 아니었다. 일단 제주도 비행기표는 평일과 주말의 가격차이가 너무 심했고, 점점 사람이 많아지면서 조용한 동네가 사라지는 점이 안타까웠다. 제주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비행기 대신 정해진 가격에 갈 수 있는 곳은 어딜까, 하고 찾다가 발견한 곳이 남해였다.
사실 남해가 제주도 보다 더 멀다. 서울 남부 터미널에서 버스로만 5시간 넘게 달려가야 나오고, 제주만큼 대중교통이 발달되지 않아 차가 없으면 다니기 힘들다.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동안은 또 남해에 푹 빠져 자주 내려갔는데, 그 이유는 바로 '조용함' 과 '유자 막걸리'였다. 제주만큼이나 옥빛을 자랑하는 바다와 은빛 모래, 하지만 제주의 반의 반도 되지 않는 관광객으로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해변. 관광객이 많긴 하지만 시간만 잘 맞추면 역시나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다랭이마을과, 그 위 꼭대기에 위치한 '시골할매 막걸리'.
남해 자체가 차가 없이는 돌아다니기 힘든 곳이라, 뚜벅이인 나와 친구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한 남자분의 차를 얻어타고 도착했다. 그 분도 혼자 다니면 식사가 어려워 우리와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고, 처음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일단 뷰에 감탄했다.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해있어, 한눈에 들어오는 초록초록한 다랭이마을과 그 끝에 펼쳐진 푸른 바다. 아름다운 풍경에 눈을 떼지 못할 때 쯤, 주문한 막걸리와 파전과 멸치 쌈밥이 나왔다. 특히 이곳에서 직접 만든다는 유자잎 막걸리는 운전해주신 분께는 죄송하지만 꼭 맛을 봐야했다. '죄송해요, 한병만 저희 마실게요' 하고는 막걸리를 살살 흔들어 땄다.
이모님, 여기 막걸리 한병 더 주세요!!!
아,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멸치쌈밥과 파전과 남자분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한병은 무슨, 유자의 향긋하면서도 쌉쌀한 맛에 중독된 우리는 정신차리지 못하고 유자 막걸리를 끊임없이 시켰고, 우리가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을 예상한 남자분은 본인 밥만 먹고 일어나 가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가 간게 무슨 상관이랴, 이 곳에서밖에 마시지 못하는 유자잎 막걸리에 신이난 우리는 바다 보며 한잔, 다랭이 보며 한잔, 셀 수도 없이 많은 잔을 들이켰다. 그리고 진짜 더는 이제는 배가 불러서 못먹겠다 하고 비틀비틀 일어나는데, 문 앞에서 또 향긋한 유자 향이 나기 시작했다.
할머니, 뭐 하시는거에요?
유자 껍질 까지!!
진짜 이곳에서 막걸리를 만드는 게 확실한지, 가게 문 앞에서 할머니 세분이 앉아서 유자 껍질을 까고 계셨다. 우와아아아, 술에 취해 한껏 흥과 텐션이 오른 우리는 자연스럽게 할머니들이 유자를 까시는 곳 옆에 철푸덕 앉아 말을 걸었다. 유자 막걸리가 진짜 맛있네요, 유자 너무 맛있어요, 나도 유자 막걸리 담그고 싶다, 그러고보니 이제 겨울인데 유자청 담궈서 차로 마시면 그것도 진짜 맛있겠다. 의식의 흐름대로 아무말이나 내뱉으며 할머니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던 그때, 할머니가 툭 하고 한마디를 던지셨다.
유자 사갈래? 20개 만원만 줘-
거리낌없이 옆에서 말을 걸며 친한척 하는 우리가 귀여우셨던 건지, 할머니가 파격 제안을 하셨다. 유자청을 만들거면 못생긴 유자 20개를 만원에 주시겠다는 말. 파격적인 그 가격에 우리는 정신을 못차리고 혼미해졌고, 20개? 20개면 얼마나 만들 수 있지? 그럼 저 2만원어치 살래요!! 하고 내뱉고 말았다. 2만원어치 괜찮겠어? 하고서는 할머니는 유자 40개를 들고 나오셨고, 그제야 우리는 잠깐 술이 깨기 시작했다. 아, 이거 귤 아니라 유자 였지 ...
그런데 문제는 술이 정말 잠깐만 깨고, 다시 만취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아, 40개 정도 그냥 택시 타고 들고 가면 되지!! 하고서는 그걸 그대로 받아 들었다. 콜 택시를 부르고 그 택시 뒷 트렁크에 유자 40개를 넣으면서도 우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걸 들고 가서 유자청을 만들자! 그걸 막걸리에 타면 유자 막걸리가 되겠지! 라는 즐거운 상상만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렇게 유자 40개와 함께 게스트하우스에 내렸을 때, 사장님의 황당한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밥먹으러 간다던 애들이 대체 왜 유자 40개를 사서 온 걸까. 게스트하우스 마당에 유자 40개를 던져놓고서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 잠들어버린 우리는 밤이 다 되어서야 숙취에 시달리며 깨어났고, 마당에 널부러진 유자를 보며 망연자실했다. 꾸역꾸역 숙소까지는 들고왔는데 이걸 또 어떻게 서울로 들고간단말인가. 다행히도 그런 우리를 불쌍하게 여긴 천사같은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본인이 다음날 택배로 보내주겠다고 하셨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유자 40개를 이고 지고 고속버스를 탈 뻔했다.
그 이후에도 꾸준히 남해 여행은 갔지만, 더이상 시골할매 막걸리는 먹으러 가지 못했다. 유자 막걸리를 마시는 나는 기분이 참 좋고 유자처럼 상쾌하지만, 그 맛에 중독되어 술이 술을 먹고 술이 깨고 난 후에는 씁쓸한 껍질처럼 민폐와 짐덩이만 남을까봐 두번 도전하지 못했다. 다음에 가면 그 맛에 적당히 취하기 위해 코라도 먹고 마셔야하나, 고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