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타인 30년산을 만난 그 날
칵테일 편에서도 말했지만 난 양주를 좋아하지 않는다. 양주라는 표현이 너무 나이들어보이는 것 같아 쓰고 싶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 정확히 이 술들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보드카, 위스키, 데낄라, 꼬냑 등의 술들을 다 묶어서 표현하기에 이보다 좋은 말이 없다. 기본적으로 도수가 높은 술을 싫어하고 (소주를 싫어하는 이유와 동일하게 너무 빨리 취해서) 도수 높은 술에서 나는 짙은 알콜향도 별로 안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유독 싫어하는 게 바로 위스키다. 영화에서 부자들이 고민을 할 때면, 혹은 멋있는 재벌가 역할을 하는 남자배우가 실의에 빠지면 항상 나오는 위스키. 멋과 향이 가득한 술이지만 나와는 정말 맞지 않다.
처음 위스키를 마셔본 건 대학교 1학년때였다. 추석이었는지 구정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명절이었고, 모든 사촌들이 다 우리집에 모여있었다. 어른들은 거실에, 애들은 방에 모여 놀고 있었는데, 언니가 아빠 양주를 하나 꺼내왔다. 아빠가 모셔놓기만 하고 먹지 않았던 위스키를 우리도 다 성인이니 한번 마셔보자는 것이다. 뚱뚱한 병이 기억나는 걸 보니 아마도 시바스리갈이었던 것 같다.
이제 나도 스무살, 드디어 위스키라는 비싼 술을 마셔보는구나 하고 설레며 한모금 마셨는데..!! 마치 몰래 담배피다 들킨 아이처럼 바로 켁켁 댔다. 위스키는 향으로 마시는 술이라고도 하던데 도대체 그 향은 어디서 느끼는 건지.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느낌이 너무 불쾌했고, 오크향은 커녕 알콜향만 느껴지고 아무 맛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 한모금이 나와 위스키 사이에 벽을 쌓았고, 십몇년간 만나지 못하게 했다.
물론 이후에도 위스키를 맛볼 일은 종종 있었다. 아빠의 찬장에 선물받은 위스키는 명절 때면 종종 자식들과 함께 하는 술자리에 올라왔고, 맛이라도 보라며 한잔씩 따라주었다. 하지만 그럴때마다 나는 정말 입술만 축이고는 바로 남동생에게 넘겨주었다. 도저히 나는 그 맛을 모르겠어서.
가끔 고급 위스키바에 가서 회식을 할 때도 있었다. 이건 어디의 유명한 위스키, 이건 비싸고 좋은 위스키, 이건 얼음과 불을 어쩌구 저쩌구 해야하만 향을 느낄 수 있는 위스키 등등. 하지만 그 어떤 위스키도 별로 달갑지 않았고, 나는 늘 입술 적시는 양 이상의 위스키를 마시지 않았다. 위스키바에서의 회식이 좋은 딱 하나의 이유였다. 내가 아예 술을 안마시게 되니, 취하지도 않는다는 점.
그렇게 위스키와 벽을 쌓고 산지 십몇년 째. 내 평생 위스키는 이렇게 멀어지나 했는데, 얼마 전에 남동생이 미국 출장을 다녀오며 발렌타인 30년산을 사왔다. 아빠 선물로 아주 큰 맘을 먹고 사온 것이었는데, 역시나 이번 명절에 아빠가 그 귀한 술을 오픈했다. 위스키를 정말 안좋아하긴 하지만 비싼 술이니 일단 받기라도 하라는 아빠 말에 한잔 받아서 향을 맡았다. 뭐, 향은 좀 나쁘지 않은 것 같네. 그리고 큰 기대없이 모든 가족의 건강을 기원하며 짠 한 후에 입술을 살짝 축였다.
어라? 좀 부드러운가?
그간 내가 도수 높은 술에서 느껴왔던 역한 알콜향이 전혀 없었다. 설마, 하는 마음에 한모금을 살짝 넘겨보았다.
부드럽잖아?!?! 세상에. 그동안 위스키는 모두 다 오크향은 커녕 썪은 나무 냄새와 알콜냄새가 섞인 것만 같았고, 목구멍을 불태우는 느낌만 가득했는데. 발렌타인 30년산은 전혀 그런 느낌없이 고풍스러운 향과 부드러운 목넘김이 내 식도를 감싸고 있었다. 이것이, 이것이 바로 발렌타인 30년산이란 말인가!!
나 이제야 위스키를 알 것 같아.
30년쯤 되어야 내 입에 맞는거였어.
뭐라는거야. 내 말에 온 가족이 비웃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알 수 있었다. 그동안 내가 위스키와 맞지 않았던 건 내 입맛이 초 고급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발렌타인 30년 이상 정도 되어야, 내 입맛에 맞는 위스키였어. 역시 사람도 술도, 30년 이상은 되어야 진가가 발휘되는 것 같다.
그날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위스키를 2잔 마셨다. 두번째 잔은 좀 더 향을 음미하고, 목넘김을 느꼈다. 입 안에서 굴리며 맛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향과 맛은 충분히 느꼈다. 그리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냉장고로 가서 칭따오 캔을 꺼냈다.
아, 역시 술은 콸콸콸콸 목구멍 열고 마셔줘야지!!!
딱 거기까지였다. 30년 이상 정도 되는 오래 숙성된, 고급 위스키일 수록 내 입맛에 맞는다는 걸 알았으니 이 정도면 됐다. 어차피 자주 마실 수 있는 술도 아니고, 그런 고가의 술을 가끔 음미하며 마시느니, 그냥 나는 맥주를 콸콸콸콸 마시는 게 훨씬 적성에 맞다. 발렌타인 30년산은 나중에 로또 당첨되면 다시 3잔 이상 마셔보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