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만의 해외여행.
귀국길 비행기 안에서, 나는 문득 시간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5일이라는 짧은 시간 속에 이토록 많은 순간들이 담길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이틀간의 겨울잠 같은 휴식을 취하고 나서야, 나는 이 기억들을 글로 남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망각이라는 깊은 늪이 이 소중한 순간들을 삼키기 전에.
출발하기 전, 딸아이에게 장난처럼 던진 말이 있다. "아빠는 이번 여행에서 얻고 싶은 게 하나 있어. 바로 내 맘대로 안 되는 걸 그냥 받아들이는 거야." 그때는 몰랐다. 이 말이 여행 내내 나를 따라다닐 운명이었다는 것을.
4박 5일이라는 시간은 처음엔 넉넉해 보였다. 하지만 비행기가 첫날을 삼켜버렸고, 남은 나흘이 마치 모래시계의 모래알처럼 빠르게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아뿔싸, 이제 겨우 4일밖에 안 남았네.' 후회도 잠시, 푸꾸옥의 햇살과 바람이 그런 마음을 금세 씻어냈다. 5년 만의 해외여행은 모든 것이 새로웠다. 청량한 남국의 하늘과 포카리스웨트 빛깔의 바다는 마치 새로 칠한 물감처럼 선명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를 때마다 내 마음속에도 작은 기쁨이 번져갔다.
여행은 우리를 달라지게 한다. 서울에서 도둑처럼 눈치 보며 사진을 찍던 내가, 이곳에서는 환영받는 포토그래퍼가 되었다. 중학생들은 웃으며 다가와 사진을 찍어달라 했고, 때로는 엄지를 치켜세우며 내 사진의 모델이 되어주었다. 이런 낯선 친절이 내 마음에 작은 물결을 일으켰다.
야시장의 밤은 또 다른 세상을 보여주었다. 어지러운 불빛 사이로 삶의 생기가 넘실거렸다. 러시아 가족들의 모습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고, 베트남 동(₫)이라는 낯선 화폐는 나를 잠시 부자로 만들어주었다. 백만 동, 이백만 동을 쓸 때마다 묘한 감정이 들었다. 관광객에겐 적당한 이 가격이 현지인들에겐 무거운 짐일 것이란 생각에 마음 한편이 무거워졌다. 그래도 망고 1kg에 2천 원이라는 가격은 서울의 일상을 잠시 잊게 해 주었다.
셋째 날의 사파리는 여행의 정점이었다. 빈펄이 만든 거대한 공간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친구의 값비싼 아프리카 신혼여행 이야기 속 기린 식당을 이곳에서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몇 만 원으로 누리는 이 특별한 경험은 마치 선물 같았다. 이곳에서 만난 가족들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러시아 가족들은 마치 동화 속 인물들 같았다. 곰 같은 아버지들과 엘프 같은 어머니들 사이에서, 우리 가족은 귀여운 초등학생들처럼 보였다. 하지만 자녀를 위해 더 나은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부모의 마음만큼은 어디서나 같았다.
넷째 날, 여행은 뜻밖의 시험을 던져주었다. 코코넛 커피 한 잔이 하루의 계획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화장실과 씨름하며 보낸 시간은 길고도 짧았다. 오밤중에 병원행을 고민할 만큼 힘들었지만, 딸을 위해 준비한 지사제가 구원자가 되어주었다. 인도 스타일의 병원행이라는 또 다른 모험은 면할 수 있었다. '그래도 내가 아파서 다행이야.' 이런 위안이 오히려 평온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하루라도 더 길게 올걸 하고 여행 내내 후회했던 내 마음이 어리석었다. 내가 가진 것은 바로 이 순간에도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
마지막 날, 비행 전 나는 잠시 싸구려 호텔에서 휴식을 취했다. 해 질 녘, 기적처럼 회복된 몸으로 찾은 바닷가 사원에서 본 일몰은 천상의 선물 같았다. 마치 자연이 우리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는 듯했다. 공항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택시 기사와의 재회도 특별했다. 경제사정으로 엔지니어에서 택시 기사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은 지 6일째라는 그의 이야기가 가슴에 와닿았다. 100만 동의 팁과 함께 건넨 행운이 그의 새로운 시작에 작은 힘이 되길 바랐다.
4박 5일의 여정이 이렇게 끝났다. 처음 바랐던 대로, 많은 일이 내 뜻대로 흐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받아들임'이라는 말을 되뇌었고, 그것은 점차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지금 내 마음속에는 조용한 미소가 피어난다. 평온과 기쁨이라는 이름의 작은 꽃처럼.
푸꾸옥의 바다와 하늘은 내게 조용히 속삭였다. '네가 바라보는 하루하루는 너를 비추는 거울이야. 잔잔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순간이 더없이 아름다워진단다.' 이 말을 가슴에 새기며, 나는 여행의 마지막 장을 조용히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