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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열 Feb 05. 2022

슬픈 베르테르의 젊음

청춘에게 바치는 편지

2016년 현재, 대한민국의 청년 실업률은 12%를 넘어서고 있다. 헬조선, 금수저와 같은 단어들이 청년들의 마음을 반영하며 나타났고, 신 구, 세대 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인터넷에서 젊은 층은 과거와 현재의 입사 스펙을 비교하며, 오늘날 취직이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 논하고 있고, 장년층은 젊은 층이 노력하지 않는다며 비판한다. 젊은 베르테르는 사랑에 슬펐지만, 베르테르의 젊음이 슬퍼지는 시절이 온 것이다.

 청년을 대표하는 대학생은 학교를 다니며 학점을 잘 받기 위해 노력하고, 공모전을 통해 스펙을 쌓고, 방학에는 어학연수를 받고, 심지어 취업 계를 학교에 제출하고 인턴을 하며 취직을 위해 노력한다. 또 열정 페이까지 하며 이력서에 한 줄 넣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이런 젊은이들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실업률은 여전히 높아만 가고 있다.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라는 구절로 우리에게 익숙한 민태원의 「청춘 예찬」은 더 이상 청춘에 의한 청춘 예찬이 아닌 청춘이 아닌 자들에 의한 예찬일 뿐이다.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대한민국 3대 악서로 불리며, 아프면 환자지 어떻게 청춘이냐며 방송 소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는 옛 말과 다르게, 더 이상 청춘이라는 허명 아래 젊은이들은 고생하기를 자처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 맞춰 사람들은 힐링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방송, 강연, 책, 노래 등등 최근의 문화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바로 ‘힐링’이다. 힐링은 영어 단어, 그 자체로 보자면 치유다.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며 할 수 있다는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말해주고, 너는 틀리지 않았다고 응원해주는 ‘힐링’에 청춘은 다른 계층보다 좀 더 특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청춘 콘서트를 통해 힐링을 하며, 기업인에 불과했던 안철수라는 사람이 대통령 후보까지 거론되는 것은 이러한 사회의 상황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힐링’을 거부한다. 힐링을 빌미로 우리의 노력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현실에 안주하다 도태되고 말 것이다. 힐링에 관련된 것들은 우리에게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며, 지금의 노력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해준다. 그러면서 청춘을 누리라며, 지금 이 시간에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을 바보 취급하기 일수다. 모두가 목표점을 향해 달리고 있는 마라톤 대회에서 풍경 구경하라며, 지금 속도로도 충분하다는 악마의 속삭임일 뿐이다. 물론 모두가 같은 목표점을 향해 달릴 수는 없다. 누군가는 다른 길을 택하고 있을 것이고 이미 목표점에 도착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또한 남들에 뒤처지기 않기 위해 달려야 하고, 달렸을 것임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힐링은 우리의 뜀박질에 물이 아닌 술을 쥐어주는 꼴이다. 농구선수였던 서장훈이 한 말이 있다. 대한민국 국가대표로서 최고의 선수였던 그는 ‘즐기는 자를 못 따라간다.’라는 말을 제일 싫어한다고 한다. 어린 시절 마냥 좋아하던 농구에 책임감을 갖게 되며 단 한 번도 즐긴 적이 없으며, 온 힘을 짜내어 전쟁처럼 해냈고, 극한까지 나를 밀어붙여야 하는데 즐길 수 있을 리가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을 나는 ‘힐링’을 외치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다. 단순히 위로를 받고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 아니라 나태함을 갖게 하는 힐링은 이 사회에서는 필요 없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가 과거보다 취업이나 성공에 대한 사회적 개방성이 매우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이미 우리와 똑같은 청춘의 시기를 거쳐 지금의 위치에 존재하는 기업의 중진들이나 사업가들은 그들의 노력에 보상을 받은 것이고,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낸 대가를 누리고 있는 것이라고 인정해줘야 한다. 풍요의 시기가 아닌 가난의 시기에서 내 자식에게 더 나은 세대를 물려주기 위해 흘린 땀을 지금의 세대가 흘리는 땀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다. 이러한 내 생각에는 부모님에 대한 존경이 담겨있다. 나는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계속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부모님이라 대답할 것이다.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모자람 없이 자랐고 부족함 없이 커왔기에,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부모님의 베풂이 어느 순간부터 내게는 커다란 감동이었고 감사함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가끔씩 부모님과의 대화에서 새 나오는 과거의 부모님 시절 얘기를 듣다 보면, 내가 감히 당신들의 노력을 평가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부모님 또한 지금과 그때의 시대적 배경이나 사회적 상황이 다르고 있음을 알고 계시고, 내 노력을 온전히 인정해 주시기에 나는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고 자부한다.


 다시 ‘힐링’으로 돌아가서 얘기를 하자면, 작금의 대한민국 청춘은 역대 최고의 청춘 실업률에 마주하여 자신들의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그들을 위로하는 게 아닌 이용하기 위한, ‘힐링’을 빙자한 ‘킬링’은 어쩌면 사회의 일면일 것이다. 다만 다음 세대를 이끌어나갈 현재의 청춘을 방해하고 막아서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은가?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해주는 따끔한 충고가 아닌 사탕발림 따위로 잠깐의 이익을 보려는 장사치들 때문에 진정한 ‘힐링’이 퇴색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를 빌미로 스스로의 게으름을 합리화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한번쯤 힐링 대란 속에서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당연히 청춘 스스로의 문제뿐만은 아닐 것이다. 사회는 매우 불합리하고 비이성적이며 누군가에게는 매우 유리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매우 불리하다. 밤을 새워 노력하고 열정을 불태웠음에도 누군가의 인맥보다, 돈보다 못해서 인정받지 못하기도 하고, 타고난 재능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또 어떤 이는 중, 고등학교 출석 일수도 채우지 않고 특례로 명문 대학에 입학하여, 수준 이하의 과제로 좋은 학점을 받아가기도 한다. 창피하지도 않은 지, 이게 자신의 능력이라며 자랑하기도 한다. 이런 불평등을 마냥 바라보기만 할수록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속 상처는 벌어져 치유를 필요로 할 것이다. 이 또한 힐링이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청춘을 대표하는 대학생의 입장에서 현재는 가끔 벅찰 때가 있다. 티브이를 틀 때마다 마주하는 몰상식한 사회의 모습은 날 지치게 하고, 소셜 네트워크 속에서 빛나는 사람들의 모습은 내 그림자를 더욱 늘려갈 뿐이다. 마라톤에 다시 한번 비유해보자면 출발점이 다르고, 신고 있는 신발이 다르며, 그동안 받아왔던 훈련의 격차가 이미 벌어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부러워하며 제자리에 주저앉을 수는 없다. 이미 차이가 난다고 포기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나는 최선을 다할 것이고, 내 노력을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남들처럼 공부하고 열심히 살지 말라는 힙합가수의 말에 멋있다고 찬사를 보내지도 않을 것이고, 삶에 지쳤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방송인의 말에 코웃음 치며 꾸준히 나아갈 것이다. 그렇게 발버둥 치다 보면 성공하지 못할 수는 있어도 스스로에게는 떳떳하지 않겠는가? 내 아이에게 부족함 없는 삶을 줄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슬픈 베르테르의 젊음을 이겨내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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