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보다 0.8° 높아요
아직 수요일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적어도 목요일, 많으면 금요일이 되어 있어야 하는 것 아닌지. 긴 연휴를 앞두고 있어 마음이 먼저 뜨는 바람에 시간이 더 길게 느껴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날씨는 조금 따뜻해졌는데 하늘이 맑진 않습니다.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지만, 다음 주에 설 연휴가 있으니 참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끔 내 꿈은 뭘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어릴 때만 해도 작가가 되는 게 꿈이었고, 어쩌다 보니 유명 프로그램의 방송 작가로 일을 해 보기도 했는데 워낙 처참한 경험이었어서 그대로 '꿈'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시간이 많이 흐르고 경력이 쌓이면 내 이름을 걸고 멋진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는데 도무지 그 환경에서는 제정신으로 버틸 수가 없어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현장에 남아있는 동기들이나 연예계 종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아주 조금 아쉬운 마음도 들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몇 년 동안 회사 생활을 하며 어느 정도 업무 능력이 쌓인 지금의 제가 다시 그 일을 한다고 해도 똑같이 혼나고 울고 내 존재를 스스로 깎아내렸을 겁니다. 나름 멘탈이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때 이후로 함부로 그런 소릴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가끔 그때의 일들이 꿈에 나오는 게 공포스러울 지경입니다.
성격 좋은데 일 못하는 사람 vs 성격 나쁜데 일 잘하는 사람. 이런 밸런스 게임이 꽤 화제를 얻었던 적이 있습니다. 각자 어떤 사람을 겪어보았느냐에 따라, 또는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선택이 갈렸었는데요. 저는 늘 "일을 못하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다."라는 입장을 내비치곤 했습니다. 지금도 그 입장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특수한 상황을 제외한다면, 무능은 어떤 것과도 상쇄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나의 무능은 타인의 짐을 더 무겁게 만드는 방해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남을 생각하지 않고 나만 생각하는 것을 무능함이라고 정의합니다. 기본적으로 일은 전부 '남'을 위해서 합니다. 나를 위한다면 굳이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릴 필요도, 땀을 뻘뻘 흘리며 물건을 만들 필요도, 국내외를 발 바쁘게 오가며 사람들을 만날 필요도 없을 테니까요. 결국 우리는 소비자를 위해, 또는 동료나 상사를 위해, 또는 대표를 위해, 또는 그 누군가를 위해. 끊임없이 일하고 있는 셈입니다. 모든 일은 타인을 위한 것입니다.
보통 주변을 잘 살필 줄 아는 사람이 일을 잘하더랍니다. 남을 도와줄 줄 아는 사람이 일을 잘하고요. 그리고 내가 조금 희생하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일을 잘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공부로 쌓은 지식만으로 해낼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자료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부가 설명이나 추가 자료를 덧붙이고, 누군가 수정할 필요 없도록 꼼꼼하게 두 번 세 번 확인을 거치며, 더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내기 위해 자존심을 내려놓고 서글서글하게 말을 붙이기도 합니다. 흔히들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들 중 같이 일하기 힘든 사람들이 많은 이유도 이런 부분의 영향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유능은 남을 위한 마음을 가지고 남을 도울 때 발현되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백 퍼센트 맞아떨어지는 확률은 아닙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전부 무능할 경우, 유능하게 살아갈 힘조차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일하는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남에게 일을 시키려고만 하는 사람일 때와, 모두가 남의 일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하는 사람일 때. 내가 어떤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 내가 일하는 태도도 달라질 테니까요.
방송 작가로 두 개의 프로그램을 거쳤습니다. 하나는 유명한 여행 예능, 하나는 유명하지 않은 음악 예능. 보통은 전자에서 일하는 것을 부러워했지만, 적어도 저는 후자에서 일할 때가 훨씬 즐거웠습니다. 무능한 사수와 유능한 사수. 그것만으로도 답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전자에서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못하는 후배가, 후자에서는 다음 프로그램도 같이 하고 싶은 후배가 되었습니다. 누구의 영향이었을까요?
첫 프로그램에서 시간을 보내는 내내 나는 내가 아무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새벽 택시를 타고 집에 가면서, 차마 부모님께는 힘든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지 않아 언니와 통화를 하면서 엉엉 울던 게 잊히지 않습니다. 같은 일을 하는 동기와 통화를 하며 내가 쓸모없는 존재가 된 것 같다고 토로하며 울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일을 잘하는 사람인데 왜 나만 일을 못 할까. 이곳에서만 일을 못하는 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똑같이 일을 못할까 봐 그게 가장 두려웠습니다.
물론 그때의 저는 일을 못하는 사람이긴 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년생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두 번째 프로그램에서 말 그대로 '무섭지만 일을 잘하는 사수'를 만나게 되면서 하나하나 제대로 일하는 법을 배워나가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지,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다 못해 회의록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 전 프로그램에서는 하나도 배운 적이 없는 일머리들을 차곡차곡 쌓아나갔습니다.
방송작가 업무 특성상 잠을 잘 자지 못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첫 번째 사수는 밤을 새우고 비행기를 타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제게 어떻게 차량을 배정할 것인지 빨리 정하라며 제 손에 종이를 쥐어 주었습니다. 두 번째 사수는 선배들에게 대신 제 상태를 말해주고, 제가 조금이나마 잠을 자고 올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팀 내에서 저 다음으로 연차가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혼난 기억도 많긴 했지만, 그 일 하나만으로도 저는 여전히 두 번째 사수를 너무나 고마운 존재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 직장에서의 저는 일을 잘한다고 칭찬받기도 하고 없으면 안 된다고 한껏 띄워지기도 합니다. 이곳의 사람들은 (팀장 제외) 자신이 맡은 일도 열심히 하지만, 누군가 해야 할 일이 생겼을 때도 최대한 미루지 않고 서로 나누어서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중 가장 오래 직장 생활을 이어가고 있고, 당장 사표를 제출하고 싶을 만큼 힘이 들지도 않습니다. 유능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이야기를 하다 보니 두서없이 길어졌는데 아무튼 그렇습니다. 저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고 싶고, 일을 잘하는 사람은 남을 생각하며 일하는 사람이기에, 저는 앞으로도 나보다 남을 좀 더 생각하며 일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좋은 영향을 주고받는 사회인이 되고 싶어요. 그리고 새로운 꿈을 좇을 수 있게 된다면 더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