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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면

어제보다 1.9° 낮아요

by 수민

세 번째 연말정산을 마쳤습니다. 매년 해야 하는 일인데도 매번 처음 하는 것처럼 헤매게 되는 요상한 일거리입니다. 기부금 영수증 챙기랴, 집 계약서며 등본이며 이체확인증이며 잡다한 자료들 프린트하랴, 빼먹은 건 없는지 확인하랴. 막상 제출하고 보면 참 별 것 아닌데도 연말정산 공지가 뜨면 늘 피곤함부터 몰려옵니다. 아직도 연말정산이 뭘 내고받는 건지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라 더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어른이 되면 이런 어려운 말쯤은 다 통달하게 될 줄 알았는데 여전히 모른 채로 살고 있습니다.


저번 글에서 제 두 번째 사수 얘기를 했었죠. 당시 프로그램은 오디션 및 경연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참가자의 수가 많았고, 그만큼 인터뷰 내용도 많았습니다. 한 명 당 몇 장은 나올 정도로 분량이 꽤 되었는데 사수는 그걸 꼭 전부 다 읽곤 했습니다. 본인이 담당하지 않는 참가자의 인터뷰까지 전부요. 그리고 아직까지 기억에 선명한 말을 해 주었는데, "모든 건 정보 싸움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면서 말입니다. 그 뒤로도 저는 종종 사수의 그 말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많이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알고 말을 하는 것과 잘 알지 못하고 말을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알고 있는 사람은 횡설수설하지 않습니다. 잘 모르고 있는 사람이 보통 혀가 길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인이 뱉은 말에 대해 질문했을 때, 알고 있는 사람은 잘 대답하지만 잘 모르는 사람은 말문이 막힙니다.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요새 티비에서나 주변에서나 많이 만나곤 합니다.


작년 말쯤, 대학생 후배를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다 턱, 걸리는 구간이 있었습니다. 일단은 끝까지 들어보자는 마음으로 가만히 듣고 있는데 결정적으로 피가 차게 식는 소리가 나오는 순간 속으로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릅니다. 이걸 얘기를 해 줘야 할까. 아니면 그냥 가만히 넘어가야 할까. 하지만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어렵사리 운을 뗐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어? 여기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찾아 봤어? 차근차근 물었을 때, 당연하게도 후배는 명확한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잘 알지 못했을 테니까요.


그래도 후배는 귀를 열고 제 말을 잘 들어 주었습니다. 정말로 제 이야기가 잘 흡수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랬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 친구는 앞으로 영향을 미칠 사람이 아주 많기 때문입니다. 그 무거움을 잘 알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일부러 짚고 넘어간 것도 있습니다. 상대의 말을 듣지조차 않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으니 귀를 열었다는 것만으로도 칭찬하고 싶은 일입니다.


참 쉽게 말하는 세상입니다. 무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내 머릿속의 문장들이 틀렸다는 가정조차 하지 못하고 말을 뱉습니다. 일례로 '페미'라는 단어는 어느 순간부터 만인의 주적이 되었고, 상종해선 안 될 악한 사상으로 통칭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중 정말로 '페미'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파고들어 본 사람이 있을까요?


자, 국어사전에 '페미'의 원어인 페미니즘을 검색해 봅시다. 그럼 '성별로 인해 발생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견해.'라고 나옵니다. 쉽게 말해 여성에 대한 차별을 없애자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쉽게 생각해 볼까요. 당신은 남자와 여자 모두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남자와 여자 모두 직장을 가지고, 돈을 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남자와 여자가 같은 직급에서 같은 성과를 냈을 때, 같은 금액의 월급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다면 당신은 페미니스트입니다. 간단합니다.


물론 모든 사상이 그렇듯 극단으로 뻗어나가게 되면 말도 안 되는 주장이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흔히들 착각하는 여성우월주의가 그러합니다. 여성이 특별한 취급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도 평범한 사람으로 존중받고 싶어 하는 것이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합니다. 페미니즘이 없었더라면 아마 지금 저는 이런 글을 쓸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여자가 어딜 대학을 가나요? 쓸데없이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지요? 가서 커피나 타오라는 이야기나 들었을 겁니다. 지금은 이런 발언을 하면 질타를 받지만, 적어도 과거에는 그랬습니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지만 아직까지 남아있는 잔재를 없애기 위해 여전히 여자들은 '페미'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를 때는 저도 '페미니스트'라는 말에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잘 알지 못했을 때는 그랬습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과격한 말을 하고, 피곤한 갈등을 일으키고, 끝없이 불만을 표출할까? 알기 시작하면서부터 하나씩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반발하지 않으면 들어주지 않으니까, 피곤하다는 이유로 논쟁조차 해 주지 않았으니까, 불만을 표출하지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하니까. 그들이 말하고 행동한 덕분에 내 개인의 삶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을 다닐 수 있었고, 회사에서 일할 수 있고, 혼자 집을 얻어 살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쓰다 보니 말이 길어졌습니다. 아무튼 '아는 것'은 늘 중요합니다. 나는 내가 하는 말이 누군가를 비하하는 말일까 봐, 누군가를 편견으로 대하는 말일까 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말일까 봐 두렵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고 뱉는 말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알아가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알려고 노력합니다. 유행하는 말들을 쉽게 쓰기보다 어디서 이 말들이 시작되었는지 찾아보게 되고, 다투는 사람들을 볼 때 어떤 이유로 이렇게 싸움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그 시작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내가 내 손으로 그런 정보를 찾아보게 됩니다.


어른이 되면 늘 평온한 마음가짐으로 여유를 가지고 무던하게 살게 될 줄 알았는데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이 쌓이면서 오히려 더 예민해지고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 일인지. 어떤 게 잘못된 길인지. 내가 알고 있는 게 맞는지. 새로 알아야 할 것은 없는지. 머릿속에 빼곡한 물음표를 채우고 살아갑니다. 피곤하고 괴로울지언정 저는 계속해서 내 손으로 무수한 정보를 모으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적어도 내가 입 밖으로 뱉는 말들에 대해 누군가 물었을 때 말끝을 흐리지 않고 잘 대답하는 사람이 되려면 그렇게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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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아 댓글에 조용히 싫어요를 누른 많은 사람의 마음에 공감하게 됩니다.

http://www.dspress.org/news/articleView.html?idxno=5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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