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보다 0.5° 높아요
이번 겨울은 좀 덜 춥게 지나가나 했더니 결국 한파가 왔습니다. 작년 겨울 추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요. 목이 간질거리는 게 싫어 목티도, 목도리도 좋아하지 않지만 추위 앞에 장사 있나요. 생일 선물로 받은 비교적 얇은 목도리로 버티다가 이기지 못하고 두꺼운 목도리를 꺼냈습니다. 얼굴의 반을 가리고 나가도 촘촘한 옷감을 뚫고 들어오는 바람이 너무 차가웠습니다. 목도리를 둘둘 둘러감은 모습이 상가 유리창에 반사되어 보이면 좀 우습기도 합니다. 그렇게까지 꽁꽁 싸맸는데도 코와 뺨이 시려서 걷는 중간중간마다 목도리에 얼굴을 푹 박고 추위가 가시길 기다려야 했습니다.
여름과 겨울 중 하나를 고르라면 망설임 없이 여름을 고르는 제게 한파는 모든 의욕을 상실하고 나태의 삶에 빠져들게 만드는 일등 공신입니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걸어서 목과 어깨가 아프고, 출근길에 얼어버린 몸은 따뜻하고 건조한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미친 듯이 몰려오는 졸음과 시시각각 싸워야 합니다. 안 그래도 늘 사정이 좋지 않은 피부는 더 사정없이 갈라지고, 비염 때문에 눈 앞머리나 입술 언저리가 간지러워지기도 합니다. 해가 짧은 것도 싫고요. 일하는 시간은 항상 똑같은데도 이상하게 겨울은 내 하루가 더 빨리 끝나는 느낌이 듭니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회사에서 보내야 하는데 그 외의 '내' 시간이 줄어드는 것 같달까요. 물론 해가 좀 길어진다고 해서 특별히 부지런해지는 건 아닙니다.
그래도 오늘은 날씨가 많이 풀려서 얇은 목도리를 들고 나왔습니다. 심지어 예상보다 날씨가 춥지 않아 그냥 들고만 다녔습니다. 목도리 사진을 찍어둔 게 없네요. 초록색 체크무늬인데 산뜻하고 예쁩니다. 원래 초록색에 그다지 감흥이 없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좋아졌습니다. 새 집으로 이사하면서 이런저런 꾸밀 물건들을 살 때도 되도록 숲 느낌이 나는 색들로 맞추려고 노력했습니다. 확실히 쓸 수 있는 돈의 양이 늘어나니까 구매하는 즐거움이 커지더군요. 오늘의 집 VIP 등급을 찍고 정신을 차렸습니다. 쓸데없는 조개 모양 트레이 같은 걸 장바구니에 담고 있는 나를 보며 자괴감이 좀 들었달까요.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명언이 모든 세대의 명언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놈의 감성템은 왜 그리 많고 왜 그리 비싼지. 이사 전후로 오늘의 집을 월세방 삼아 몇 달을 보냈더니 이젠 카페나 음식점에 가도 저 의자, 저 소품 엄청 비쌀 텐데 라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눈에 바코드 인식기가 달린 기분이에요. 천천히 떼어내 보겠습니다.
작년 8월에 새 집으로 이사를 했고, 이제 5개월이 빠듯하게 채워졌습니다. 이사한 집은 좋습니다. 회사가 더 가까워졌고, 평수도 훨씬 넓어졌습니다. 원룸이지만 화장실이 딸린 주방이 분리되어 있어 공간을 활용하기도 좋습니다. 이젠 빨래 건조대를 펼쳐 놓아도 잔여 공간이 많습니다. 빨래 건조대와 요가 매트를 동시에 펼쳐놓아도 아주 넉넉합니다. 멋지죠? 전에 살던 집은 그걸 중복으로 선택할 수가 없었거든요.
올 겨울 난방비가 어떻게 나올지가 꽤 주목받는 이슈였습니다. 처음으로 온돌 기능에 예약을 걸어서 돌려봤는데 터무니없는 금액만은 나오지 않기를 빌었답니다. 3년 전에 강원도 홍천에서 잠깐 지낸 적이 있는데 그때 난방비로 어마어마한 돈이 빠져나가서 엄마에게 전화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엄마, 0이 잘못 붙은 것 같아. 엄마가 그랬죠. LPG라서 그럴 수 있다. 그때 이후로 저는 LPG에 학을 뗐습니다. 홍천은 정말 추웠습니다. 그런데도 난방을 못 틀었어요. 비싸서. 집에서 라디에이터를 가져와서 잠깐씩 틀고 그 외의 모든 시간은 전기장판을 부여잡고 지냈습니다. 그때 집이 꽤 넓었는데 겨울 내내 침대 밖을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건 뭐 땅따먹기도 아니고 내 땅은 침대 밖에 없었던 그런. 도시가스는 축복입니다. 가능한 누리세요.
다행히 난방비는 적당한 금액으로 날아왔습니다. 아, 그리고 다이소에 아주 폭신폭신해 보이는 실내화가 있길래 하나 사서 겨우내 신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닥이 그리 따뜻하지 않아도 춥지 않았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실내화 좋아요. 추천합니다. 저번 집은 너무 좁아서 실내화 같은 걸 신을 엄두도 못 냈는데 역시 넓은 집이 좋습니다. 지하철 역에서 가깝고 좁은 집과 멀고 넓은 집 중에 고르라면 무조건 후자입니다. 직장인은 좀 걸을 필요가 있습니다. 걸어 다니면 육체 건강이 좋아지고 집이 넓어지면 정신 건강이 좋아지니 일석 이조 아니겠나요.
오랜만에 글을 쓰면 꼭 이렇게 길어집니다. 어떤 할당량 같은 게 있나 봅니다. 이렇게 그동안 쓰지 않고 묵혀두었던 말들을 풀어놓고 나면 얼마 못 가 글이 쓰기 싫어집니다. 나태의 삶이 보통 이런 식으로 찾아옵니다. 열심히 해 보자고 반짝했다가 그 속도를 못 이기고 꼬라 박힙니다. 그래서 이번엔 쓰기 싫어도 그냥 쓰기 싫다고 하면서 써보려고 합니다. 나이 서른 먹은 기념으로다가.
너무 글만 쓴 것 같으니까 시각 자료를 첨부해 볼까요.
1월 1일의 밥상입니다. 아파서 자다가 새해를 맞이한 건 처음이었습니다. 전날 병원에 갔는데 겨울철이라 아픈 사람들이 많아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습니다. 다행히 집이 가까워서 예약을 걸어두고 쉬다가 다시 나왔는데 가 보니 어린아이들이 많았어요. 전에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요새는 조카들 생각이 나서인지 안쓰러운 마음이 먼저 듭니다. 저 쪼그만 게 아플 데가 어디 있다고. 가벼운 감기로도 이렇게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데 아이가 많이 아프거나, 멀리 보내게 된 경우에는 얼마나 힘들고 괴로울까 싶기도 합니다. 조카의 존재는 이렇게 간혹 발굴되지 않은 새 감정을 캐내어 주곤 합니다. 앞으로도 그러겠죠?
자고 일어나니 새해였습니다. 평소엔 아침을 안 먹는데 약을 먹어야 해서 전날 해 둔 갈치조림을 꺼냈습니다. 부모님과 떨어져 살다 보니 가끔 반찬이나 좋은 식재료를 보내 주시는데 이때는 갈치를 보내주셨어요. 구이도 좋아하지만, 냄새가 많이 날 것 같아서 무를 넣고 조림을 만들었습니다. 요리에 재미를 들였더니 이런 것도 혼자 만들어먹게 되네요. 그래도 새해인데 떡국은 먹어야 할 것 같아 떡국도 끓였구요. 진한 사골 국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깔끔하고 삼삼하게 맛있었습니다. 이 떡국에는 언니가 준 소고기를 넣었습니다. 그러 고보니 아침은 부모님과, 점심은 언니와 함께했네요. 저녁엔 닭날개로 버팔로윙을 만들어봤습니다. 사세 브랜드에서 나오는 제품을 좋아하는데 비싸기도 하고 괜히 몸에 안 좋을 것 같은 맛이라 도전해 봤는데 사 먹는 게 몸엔 좀 나빠도 정신 건강에는 좋은 것 같습니다. 맛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이미 대기업의 술수에 길들여진 혓바닥이 평가를 박하게 줘서 아쉬웠네요.
샤브샤브를 자주 먹습니다. 재료 손질만 하면 돼서 준비 시간이 짧거든요. 배추, 숙주, 버섯은 거의 고정 재료고 가끔 청경채나 미나리를 추가합니다. 마트 채소는 비싸기도 하고 가격이 널을 뛰는 게 심한 편이라 주로 집 가는 길에 있는 농산물 직판장에 들러 한 봉지, 두 봉지, 가볍게 사 가곤 합니다. 소스는 그때마다 다른데 보통은 참소스, 참깨소스, 샤브수끼 소스를 많이 먹습니다. 스위트칠리보다 샤브수끼 소스가 더 맛있었어요. 그리고 냉장고에 화석처럼 틀어박혀 있던 유자폰즈 소스를 이번에 열어봤는데 오, 생각보다 더 괜찮았습니다. 꾸준히 먹을 듯합니다. 한참 하이디라오 건희 소스를 맛있게 먹었을 때 땅콩이니 고추기름이니 사들여서 야매 소스를 만들어 먹곤 했었는데 요새는 그럴 기력이 없어서 포기했습니다.
벌써 1월의 중반이 다 되어 갑니다. 작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어수선하고 복잡한 나날을 보내느라 우울해지기도 하고, 냅다 울기도 하고, 답지 않게 감정적으로 많이 흔들리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밥을 해 먹는 것조차 힘들어서 몇 번이고 음식을 배달시켜 먹는가 하면 나름 꾸준히 해 보려던 운동도 이전처럼 열심히 하지 못했고요. 근접한 문화회관에 헬스장이 있어 오만 원을 주고 회원권을 끊었는데 그냥 구 발전 기금을 낸 사람이 되었습니다. 집에서 요가 매트 깔고 간신히 홈트 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덜으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잘 안 된 날이 많았습니다. 이걸 다 겨울 탓으로 돌리는 중입니다. 원인 제공 계절과 이제 그만 결별하고 싶습니다.
하고 싶은 것들이 화수분처럼 생겨나는 반면, 뇌내 망상으로 끝나는 엔딩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내가 나를 이겨야 하는 문제가 대부분이라 도와달라고 매달릴 곳도 없다는 게 괴롭습니다. 이상한 일이죠. 나약한 내가 너무 강해서 계속 나약하게 살게 된다는 점이. 올해는 비등비등하게 싸워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쉽지 않은 한 해가 될 것 같습니다. 슬픈 예감은 잘 틀리지 않는 법이라.
어제 윌레스와 그로밋: 복수의 날개를 봤는데 인공지능 로봇인 노봇이 새로운 캐릭터로 등장했습니다. 악당 펭귄이 그 로봇을 해킹해서 착한 노봇이 사악한 노봇이 되도록 설정을 바꿔놓는 장면이 나오고요. 인생이 가끔 그렇게 이지 모드에서 하드 모드가 될 때가 있습니다. 지금껏 많은 하드 모드를 경험해 보긴 했지만, 그래서 그만큼 힘들진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어려운 건 어려운 거잖아요? 누군가 해킹해서 설정을 바꿔놓은 것처럼 일순간 삶이 버거워질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드니 속이 좀 무겁습니다. 그 또한 언제든 바뀔 수 있다는 마음으로 버텨보려고 합니다.
오늘 저녁엔 초밥 먹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