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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날입니다

어제보다 5.5° 낮아요

by 수민

일찍 자기 프로젝트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은 정말 멋진 발명품이지만, 자세히 보면 힘들고 오래 보면 괴롭습니다. 물론 핑계는 있는데요. 퇴근하고 집에 와서 요리를 해 먹고 잡다한 집안일을 하다 보면 몇 배속을 돌린 것처럼 시간이 훌쩍 지나기 때문입니다. 해야 할 일을 얼추 마무리하면 10시에서 11시 정도가 되는데 그때부터 자유로운 어른의 시간을 즐깁니다. 야식을 먹거나, 노트북을 켜는 건 비교적 건강한 일에 속합니다. 오늘 힘들었으니 일찍 자야겠다는 마음으로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켜서 유튜브에 들어가는 순간 비극은 시작됩니다. 새벽 한 두시에 잠드는 게 일상이 되고 심하면 서너 시를 넘어가버리니 몸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더군요.


한 달 하고도 조금 전의 어떤 날. 퇴근하고 친구와 맛있는 것을 먹기로 했습니다. 분점이 많은 회전초밥 가게로 늘 웨이팅이 있을 만큼 인기가 좋은 곳입니다. 감사하게도 퇴근 시간이 빠른 친구가 매번 미리 가서 대기를 걸어주어 편하게 먹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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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느낌입니다. 배부르게 먹어도 4만 원을 넘긴 적은 없었고, 대부분 3만 원 초중반이었습니다. 학생 때는 한 끼로 상상도 못 하던 가격인데 지금도 좀 어려운 가격이긴 합니다. 휴학하고 초밥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 한 판에 가득 채워 나가는 세트 초밥을 사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생각했던 게 떠오르네요.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 이벤트 느낌으로나마 사 먹을 수 있는 형편이 되었으니 적어도 꿈 하나는 이룬 셈입니다.


배부르게 먹고, 맥도날드에서 아이스크림 하나 먹고, 스타벅스로 건너가 음료수 한 잔 마시고 귀가했습니다. 버스가 오지 않아 정류장에서 한참 기다렸었지요. 따끈따끈하게 열선이 깔린 의자가 아니었으면 진작에 지하철 타고 다른 길로 갔을 텐데 의자에 붙인 엉덩이를 뗄 수가 없어서 십 분이고 이십 분이고 기다렸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거의 열 시가 다 되어있었어요. 다음날 출근을 해야 하니까 서둘러서 잘 준비를 했습니다.


그날은 12월 3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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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였을까요. 저의 내란성 스트레스가 시작된 것이.


친구와 잘 들어갔냐는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는데 속보가 떴습니다. 비상계엄을 선포했다는 기사가 뜨고, 등줄기가 서늘해졌습니다. 당혹스러움을 넘어서 공포가 느껴졌습니다. 각종 커뮤니티를 타고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이야기들은 2024년에 일어날 법한 일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 일들이었습니다. 총을 든 군인들과 도로를 점거한 장갑차.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국군의 날 행사 장면. 도로를 달리는 탱크를 보고 혀를 차던 게 엊그제 같은데 혀를 차다 못해 혀를 씹을 일이 벌어졌고 그야말로 시야가 흐릿해졌습니다.


잠을 잘 수 없었어요. 잘 수가 없었죠. 분마다, 초마다, 새로고침을 누르면서 창밖으로 멀어지는 헬기의 소음을 들으면서. 눈을 뜨고 일어나면 독재 국가가 되어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모든 것을 지켜봤습니다. 내가 지켜본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창문을 부수는 군인들의 모습과 안건이 올라오길 기다리며 초조하게 발을 구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번갈아 지나갈 때마다 부디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지길 바랐습니다. 냉혹한 현실 따위 겪고 싶지 않았어요.


길고 길었던 서울의 밤은 계엄 해제가 이루어지면서 간신히 끝날 수 있었습니다. 그 밤을 넘기지 못했더라면 우린 얼마나 오랜 밤 속에 멈춰 서 있어야 했을까요. 광복절을 광복절이라 부르는 이유를 피부로 느끼게 된 밤이었습니다. 쉽게 뜬 해가 아니었구나. 과거의 그들은 끝을 알 수 없는 밤에 갇혀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런 사무치는 감정도 몰려왔었습니다.


그날로부터 한 달 하고도 조금. 어제 그 친구와 그 초밥집에 가서 밥을 먹었습니다. 초밥은 맛있었고 날은 추웠어요. 헤어지면서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데자뷰처럼, 각자 집에 돌아가 잘 들어갔냐고 연락을 나누는 그 순간에 체포 소식이 들려왔으면 좋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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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고 24시간이 되기 전에 체포되었으니 나름 타이밍이 잘 맞았다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그래서 오늘은 좋은 날입니다. 물론 이후에도 해결되어야 할 일들이 산더미 같이 쌓여있지만, 어려운 첫 삽을 떴으니 차차 속도가 붙겠지요.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우니까요. 이 명제는 오늘 잡혀 들어간 그 사람에게도 해당되는 명제이니 그가 두 번째 삽을 뜨지 못하도록 서둘러 삽을 빼앗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젯밤은 일찍 자기 프로젝트를 꽤 성공적으로 해냈습니다. 늦게 귀가한 만큼 서둘러서 잘 준비를 마쳤거든요. 그날 이후로 자기 전과 눈 뜬 후에 뉴스를 확인하는 일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어제는 곧 영장 집행이 이루어질 것 같다는 기사를 보고 잠들었어요.


터널을 통과하기 직전이 되면 도로가 은은하게 밝아집니다. 입구를 빠져나와 쏟아지는 빛을 받으면 묘한 해방감이 들기도 해요. 그런 기분으로 눈을 감았더니 잠이 잘 오더라구요. 앞으로도 몇 번의 터널을 지나가겠지만 끝나지 않는 터널은 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차가운 분노는 뜨거운 희망이 되고, 그 희망은 따뜻한 평화가 될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친구와 초밥집에 한 번 더 가야겠어요. 좋은 날이니까요.


https://youtu.be/Zbo7UY8dxh8?si=OXfsRZns7IYB2ZXH

우연히 들었다가 너무 좋아서 계속 듣고 있는 노래인데요. 희망을 귀로 들을 수 있다면 이런 느낌일 듯합니다. 언젠가 탁 트인 전경을 눈에 담으면서 이 노래를 듣고 싶습니다. 한 번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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