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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sslee Jan 26. 2022

훈데존 안에서 강아지를 이롭게 하라

'동그람이: 동물 그리고 사람' 에 연재된 글 입니다. 

오스트리아에는 반려동물들을 위한 표지판 내지 시설들이 잘 마련되어 있는 편이다. 그 중 수지와 내가 가장 자주 활용하고, 동시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시설은 바로 반려견 전용 놀이터다. 비엔나 주택가, 시내, 교외 곳곳에 마련되어 있는 반려견 전용 놀이터는 10평 정도의 작은 흙밭부터 수천평 규모의 공원이나 동산 전체가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반려견 놀이터는 강아지라는 뜻의 훈데(Hunde)에 장소라는 뜻의 존(zone)을 붙여 훈데존(Hundezone) 이라고 불린다. 반려동물 금지 표지판이 없다면 거의 모든 공간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비엔나에서도 이 훈데존이 특별한 이유는, 훈데존 안에서만큼은 사람보다 강아지의 권리가 조금 더 보장되기 때문이다.

 

내가 정성껏 싸간 김밥을 큰 반려견들이 와서 헤집어 놓아도 상대방에게 화내지 못하고, 반대로 수지가 다른 사람을 쫓아다니며 뽀뽀를 하고 점프를 해도 ‘허허’하고 넘어가 주는 곳이 바로 훈데존이다. 이 구역 안에서의 또 한 가지 중요한 포인트는 목줄을 풀어줄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장소에서만큼은 ‘반려견의 목줄을 풀어줘도 된다’ 라기보다, 반드시 풀어주어야 한다는 개념에 가깝다. 

수지가 첫 딸인 나는 다른 강아지들이 수지를 건드리는 것이 걱정스러워서 훈데존에서도 목줄을 꽁꽁 붙잡고 있곤 했다. 그럴 때마다 다른 반려인들이 아이를 풀어줘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곤 했다. 줄에 묶여있는 모습이 다른 강아지들을 자극하고, 줄에 아이들이 엉켜 위험하다는 이유였다. 수지도 처음엔 낯을 가리고 몸집 큰 다른 애들에게 치이기도 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유의 맛을 발견했다.


훈데존 안에서만큼은 목줄 없는 자유를 


반려견은 훈데존에서만큼은 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놀 수 있다.

우리 집은 5~6층 규모의 연립주택들이 성냥갑처럼 나란히 서 있는 주택지구에 위치하고 있어 작은 공터조차 찾기 힘들다. 그럼에도 우리 집에서 채 100m가 떨어져 있지 않는 곳에 훈데존이 있다. 우리 동네 훈데존은 10평 남짓의 작은 크기로, 흙바닥의 공터에 가슴 높이 정도 울타리를 두르고 'Hundezone' 이라고 써진 푯말을 크게 붙여놓은 것이 전부다. 반려인을 위해 마련해 준 것이 있다면, 배변봉투와 쓰레기통, 그리고 작은 벤치를 하나 놓아두었을 뿐. 하지만 이 작은 공간 덕분에 우리 동네 강아지들은 이 곳에서 배변도 하고, 서로 안부도 묻는 짧은 시간을 갖는다. 

오스트리아가 반려동물 천국이라고는 하지만, 반려견의 사교모임을 따로 가지기는 어렵다. 그런 면에서 훈데존은 다른 강아지들과 자연스러운 만남의 장소가 된다. 더욱이 동네가 같은 아이들은 그 동네 훈데존을 자주 가게 되다 보니 아이들끼리도 잘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된다. 단점이라면 마음에 안드는 친구도 계속 마주쳐야 한다는 점 정도? 

훈데존에 앉아 여러 강아지들을 지켜보다 보면 그렇게 흥미로울 수가 없다. 같은 견종이더라도 성격도 천차만별이고 강아지들 사이의 묘한 신경전까지 보이니 말이다. 


훈데존 최고 인기견은 내 딸 '수지'


수지는 훈데존에서 만나는 강아지들 사이에서 인기 만점이다.

수지는 강아지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은 암컷 강아지다. 귀가 작거나 쫑긋한 강아지들은 수지의 늘어진 귀가 마음에 들어서인지 축축해질 정도로 수지 귀를 빨아댄다. 가끔 수지를 두고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정작 수지는 도도히 싸움 현장을 떠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새침한지! 예쁜 여자의 일상이란 저런 것인지, 사람 엄마는 경험해 보지 못한 대리만족을 느끼곤 한다. 

사람세계와 마찬가지로 훈데존에서도 '뉴페이스'들은 성별과 나이를 막론하고 시선을 끈다. 냄새가 신분확인을 대신하는 반려견들 사이에서 이 신고식은 여러 마리 강아지들이 새로 온 강아지의 똥꼬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는 것으로 치뤄진다. 이 모습이 이뻐 보이지 않아서 제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냄새로 백 여가지 정보를 습득하는 강아지의 특성상 똥꼬 냄새는 사람 사이의 첫 인상만큼이나 중요한 정보이다. 


'놀이터 문화' 정착하려면 합의와 이해가 필수


훈데존에서의 놀이터 문화가 한국에서도 정착되기 위해서는 반려인과 비반려인 사이의 합의가 필수적이다.

여러 마리 강아지들이 한데 모여 있다 보니 훈데존에서도 피할 수 없이 다툼도 벌어진다. 자기 강아지가 공격성향이 있다고 생각하는 주인들은 훈데존 안에서 리드줄은 풀어주지만, 입마개는 벗기지 않는다. 수지도 두어 번 도사견에게 공격받은 적이 있는데, 다행히 상대견의 입마개 덕분에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이런 경우는 매우 격렬하고 드문 사례이지만, 작은 싸움은 종종 벌어진다. 이 경우들은 상대를 다치게 하기 위해서라기 보다, 사람들이 몸싸움 직전 벌이는 신경전처럼 액션만 취하는 정도이다. 처음 목격하는 사람들은 깜짝 놀랄 정도로 거칠어 보이지만, 조금만 지켜보다 보면 진짜 싸움과 허세를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수지랑 자주 노는 아이 중에 아키라 종 ‘타로’라는 아이와 로트와일러 종 ‘새미’라는 아이가 있는데, 수지 머리통만한 입을 가진 이 덩치 큰 두 아이들이 수지와 노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겁날 때가 있었다. 하지만 훈데존을 처음 다닐 땐 늘 배까기에 바빴던 수지가, 아이들 앞에서 자신의 이쁨을 한껏 뽐내거나, 두발 격투 끝에 새미의 배를 까게 만드는걸 보며, 아이의 성장에 큰 보람과 기쁨을 느낀다. 

훈데존은 여러모로 장점이 많은 제도지만 훈데존과 같이 ‘놀이터 문화’가 잘 정착되지 않은 나라에서는 반려인과 비반려인들 사이에 많은 합의와 이해가 필요할 것이라 생각된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자면, 훈데존은 강아지와 반려인들 위한 장소이기도 하지만, 강아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더욱 필요한 조치로도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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