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람이:동물 그리고 사람이야기' 에 연재된 글입니다.
음악과 예술의 도시, 유엔 사무국과 국제원자력기구(IAEA) 본부가 있는 국제도시이자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동유럽의 심장 빈. 1년 내내 생기가 넘치는 도시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도시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시기는 12월이 아닌가 싶다. 유럽의 가장 큰 명절인 크리스마스를 맞아 11월 중순부터 빈 시내 곳곳이 형형색색 불빛으로 장식되기 때문이다.
슈테판 대성당을 비롯해 현재 대통령 궁이자 합스부르크 왕정 시절 마리 앙투아네트가 살았던 구 왕궁, 빈 시청 앞 광장, 쉔브룬 궁전과 유명한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전시관이 있는 벨베데레 궁전 등 관광지가 몰려 있는 인네레슈타트(구 시가지) 곳곳에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크리스마스 마켓’들이 문을 연다. 크리스마스 마켓을 보기 전까지는 빈을 제대로 본 것이 아니라고 할 만큼, 크리스마스 마켓은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풍성하다. 나도 매년 도시 곳곳의 마켓들을 ‘도장 깨기’ 하듯 찾아다니곤 한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겨울을 즐기는 축제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마켓을 통해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명절 문화도 엿볼 수 있는 기회라 더욱 크리스마스 마켓을 빼놓지 않고 찾아다닌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화려한 불빛으로 장식된 빈 시청. 시청 앞 광장에서 큰 규모의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린다. 당연히 우리의 김수지 양도 함께 마켓 쇼핑에 나섰다.
마켓마다 특색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부분 장난감 가게들이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마켓을 찾는 사람들 중엔 아무래도 아이들을 위해 선물을 마련하려는 ‘산타클로스’들이 많기 때문인 듯하다. 크리스마스 마켓에서는 플라스틱 장난감보다 호두까기 인형, 오르골 같은 나무 장난감들을 주로 판매한다. 공장 제품보다 수제품이 많고, 운이 좋을 땐 가게 안쪽에서 장인이 직접 나무를 깎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마켓에서 눈에 띄는 또 다른 곳은 과자 가게다. 화려한 캔디나 초콜릿을 묻힌 과일 같은 간식들도 많지만, 내가 찾는 과자는 ‘렙쿠큰’(Lebkuchen)이라는 과자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어른 얼굴 크기만 한 두꺼운 쿠키에 글씨를 써서 줄에 매달아 놓곤 한다. 큰 쿠키의 문구로는 ‘즐거운 크리스마스, 즐거운 새해’(Frohe Weinachten, Frohes neues Jahr) 같은 연말 인사나 가족에 대한 사랑과 건강을 기원하는 문구를 넣기도 한다. 이 렙쿠큰은 연말 내내 장식처럼 집 안에 걸어뒀다가 새해 아침에 가족들과 함께 나누어 먹는다.
크리스마스 마켓에 가면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각종 문구를 적어놓은 과자 '렙 쿠큰'을 볼 수 있다.
산책과 여행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쇼핑까지 반려견과 대부분 생활을 같이 하는 빈 사람들이기에 당연히 마켓에서도 반려견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겨울이라 단단히 옷을 챙겨 입고 마켓 이곳저곳을 누비는 반려견들은 어엿한 비너른(빈 시민들을 일컫는 단어)이다. 우리가 마켓을 방문했을 때도 많은 반려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반려견들도 흥겨운 명절 분위기를 느낀 듯 신난 발걸음으로 마켓을 누비고 있었다. 우리가 찾은 시청 광장 크리스마스 마켓은 빈 마켓들 중 관광객이 가장 많은 곳이다. 공공장소, 그것도 남녀노소 모두 모이는 시청 광장에 반려견이 달갑지 않을 법도 하건만,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반려견에게 눈을 흘기거나 언짢은 기색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반려견들은 시민들과 관광객들의 사랑스러운 눈빛을 한몸에 받는 ‘시선 강탈자’들이다.
마켓에서 댕댕이 친구를 만나 신나게 냄새를 맡는 수지. 주변 사람들도 흐뭇한 미소로 지켜보고 있다.
남녀노소, 심지어는 강아지들도 설레는 크리스마스 마켓이지만, 올해 특별히 마켓 투어를 기대하고 있었던 이유는 수지와 아기를 포함한 우리 가족이 다 함께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아기들을 위한 공공장소 대부분에는 반려견을 위한 공간과 어린이를 위한 공간이 철저히 분리되어 있다. 사고를 예방하기 위함이기도 하고, 면역력이 약한 아기들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그래서 그동안 아기 사진촬영, 베이비 클래스 같은 공간에는 수지가 함께 할 수 없었는데, 크리스마스 마켓만큼은 아기는 물론 수지까지도 환영받는, 우리 가족 모두 함께하는 첫 사회적 공간인 것이다.
수지가 올해로 만 4살이 됐다. 이번이 수지에게는 벌써 네 번째 크리스마스 마켓인 것이다. 한 번 가본 장소, 한 번 본 사람을 모두 기억하는 수지에게, 크리스마스 마켓 역시 좋은 추억들이 쌓인 즐거운 장소이다. 수지는 크리스마스 마켓을 아주 제대로 즐길 줄 안다. 굴라시 수프 맛을 기억하고 수프와 빵을 파는 오두막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인형을 좋아하는 수지는 인형을 구경하기도 한다. 자신의 ‘최애’ 간식인 치즈 소시지 가게 앞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듯 한참동안 서서 움직이지 않기도 한다. 수지의 건강에는 다소 좋지 않겠지만, 크리스마스 마켓 나들이를 나온 만큼 특별히 소시지 하나를 나눠 먹었다. 한국에서도 추석과 설날엔 벨트를 풀어놓고 먹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명절에 먹는 기쁨을 어찌 빼놓을 수 있겠는가. 처음 마켓에 갈 때는 사람이 너무 많아 수지가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수지는 꼬리치기, 두발 걷기 등 각종 ‘필살기’를 선보이며 매년 마켓을 찾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한껏 즐겼다.
모두가 함께 하는 크리스마스 마켓은 빈의 크리스마스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명절이 설레고 기다려지는 이유는, 좋아하는 이들과 같은 즐거움을 공유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수지와 아기가 함께하는 2018년의 크리스마스는 우리 가족에게 더욱 즐겁고, 특별하다. 크리스마스 마켓에서의 즐거운 웃음과 달콤한 냄새의 기억이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수지와 우리에게 오래오래 가득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