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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sslee Mar 29. 2018

권태와 변덕

 브런치를 시작하며 예전에 썼던 글들을 다시 열어보는 시간을 갖고 있다. 앞서 올린 네 글들 중에는 브런치를 열고 쓴 글도 있고, 전에 썼던 글을 조금 손봐서 올린 것도 있다. 

 브런치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몇 년은 더 열어보지 않았을 생각의 파일들. 지금은 공감할 수 없는 생각들도 있고, 손발이 오글거려 읽다가 닫아버리게 되는 유치한 글들도 있다. 폴더에 가지런히 정렬된 많은 파일들 중, 지금에 와서 쓸만한 것이 없다는 건, 상당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생각의 성장이든, 생각의 변화이든, 지금의 나, 그리고 요즘의 스타일과 맞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글에도 명품이 있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멋과 맛이 깊어지는 글을 두고 하는 말일텐데, 하수 중의 하수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오래 묵혀봐야 유치하게만 느껴질 글이라면, 그때그때 털어버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꺼내온, 너무 유치하지 않은 오래된 글 하나를 가져왔다. 


 권태과 변덕


 수지를 데려온 지 일 년, 삼키로 갓 넘던 작은 강아지가 십 사키로의 말끔한 숙녀가 된 것 이외에 달라진 것이 참 많다. 

 아침 커피 마시기 전에 고놈 털 치우는 것이 우선이 되고, 응아 쉬야 편하게 하시라고 산책시키는 것도 하루 일과 중에 하나. 삼ㄹ의 사이클도 수지를 따라가게 된달까.

 하루 8시간 근무하는 상황이었다면 불가능했을 일들이지만, 쉬고 있는 시간 또 큰 축복처럼 여겨지는 것이, 이 기간 수지를 만난 것이다. 

 이런 물리적인 변화 이외에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을 들지만 마음의 변화이다. 글쎄, 이것이 백퍼센트 ‘수지효과’ 로 불릴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고물고물 귀여운 것이 확실히 내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은 사실. 

 나는 권태주의자다. 지금은 수지효과로 덕을 봤지만, 아직도 완전히 버리진 못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권태롭지 않은 사람 누가 있겠냐만, 타고난 성격이 인내심이 없고 변덕스러운데다 살아온 생활이 자리를 자주 이동해야 했던터라 권태가 내 마음에 차지하는 부분이 아주 컸었달까. 일이 손에 익어버리기 전에 질려버리는 장인정신없는 마음상태는 모든 일에 지겹기도 금방 지치기도 금방이었다. 일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한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을 소중히 여기기보단, 한 순간 불길처럼 휘몰아쳤다 냉수뿌린 듯 사그라져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한 사람을 제대로 알기도 전에 혼자 제 풀에 지쳐 나자빠져버렸던 것을, 변명스럽지만 성격 탓으로 돌려도 될까.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봐야 다를 것 없다는 사람들은 대체로 권태주의자가 많을 것이라는게 나의 추측이다. 

 회의주의자에 권태주의자이기까지한 별로 건강하지 못한 성격은, 서른도 전에 사는 낙을 잃어버렸었지만, 일 년 뒤 나도 모르던 내 모습을 끄집어 내어 준 것이 바로 지금 제 집에서 꼬물하게 오그려 낮잠을 잘도 자고 있는 우리 수지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저 녀석은 내가 낳은 듯이 나를 닮았다. 변덕이 죽끓듯한다. 남자였다면 삼개월 전에 버렸겠지만, 이도저도 못하고 일 년을 데리고 사니 지금은 저 녀석에게서 나를 발견하게 된다. 

 엄마 품에 앵겨서 부모형제 떨어져 우리 집에 온 것이 생후 2개월. 삼 개월도 젖을 못 먹고 온 것이 딱하여 이것저것 개한테 좋다는 건 다 해줬었었다. 개가 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도, 하면 큰 일 나는 듯이 극성도 부렸었다. 지금은 자고 있는 내 몸 위를 거침없이 밟고 다니지만, 그땐 엄마랑 나란히 앉지도 못했던 강제적 요조숙녀였던 김수지. 

 그런데 개를 키우는 것은 내가 알고 있던 지식대는 참 되지 않는 일이더라.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포기하고 키운 것이 일 년, 왜 한국 욕에 ‘개’ 자가 붙는 것인지 이해가 갈 만큼 보고 느꼈지만, 사랑이 커져가는건 저 변덕스러움 때문일까.

 콩주머니처럼 옹크리고 자는 모습은 일부러 귀여우려고 해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이고, 백명도 넘는 사람들 속에서 엄마라고 전력질주해서 찾아오는 모습은 감동 그 자체! 벅찬 마음으로 집에 오면 개지랄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는 친절함까지!

 그 변화무쌍한 매력에 흠뻑 빠져버린 엄마는 수지의 늪에 허덕거리고 있다.

 권태의 반대말은 즐거움이나 역동이 아닌 변덕인걸까. 

 착함의 반대가 나쁨, 예쁨의 반대는 못생김처럼, 반대된다는 것은 좋고 나쁨이 있는 것인 줄 알았었는데, 권태와 변덕, 둘 다 좋지 않은 느낌을 주는 두 단어가 이리도 콩떡찰떡처럼 같이 붙어 있는 것인 줄은 수지가 아니였다면 몰랐을 것이다. 

 아니면, 변덕이라는 것이 변화무쌍한 매력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권태라는 것도, 한 때 생에 대한 감사함을 잃게 만들었던 그 감정에서도, 좋은 면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까. 

 개수발에 하루가 다 간다면 사람들은 욕하겠지만, 하루 종일 동분서주하며 저를 위해 나를 움직이게 작은 악마에게 나는 권태와 분주함을 맞바꾸었다.

 덜 뜬 눈으로 아침을 맞았을 때, 햇살보다 먼저 내 얼굴에 와닿는 내 강아지의 따뜻한 혀의 감촉과 수면같이 파동없는 정신을 맞바꾸었다.

 오늘도 너를 자라게 하는 것은 나의 손발이고, 너는 나의 마음을 자라게 한다.

 잊고 있었던 일 년 전, 권태에 정신이 마비되어 가던 나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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