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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sslee Apr 05. 2018

내 아이의 나쁜 짓

 누가 뭐라해도 수지는 나에게 하나밖에 없는 '개딸' 이다. 친자식과 비교할 수 있겠냐만은, 아직 자식이 없는 나로서는 이토록 관심과 애정을 쏟아기는 처음인, 가족이상의 존재이다. 

 내 사랑의 크기에 비례하듯, 내 새끼의 착한 짓, 이쁜 짓에도 자부심은 대단했다. 


 수지는 혼자 잘 커준 아이였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동식물을 포함하여 육개월 이상 키워본 적이 없었던 '망손' 이건만, 부족한 엄마 아래에서 수지는 몸은 물론 마음까지 참 잘 자랐다. 

 처음 수지를 입양주던 브리더는 성견 8키로를 예상했었지만, 현재 수지의 몸무게는 20키로에 육박할 정도로 우량하게 자라주었다. 완화된 표현으로 우량하지만, 사실 좀 과체중이긴 하다.

 몸의 성장만큼 수지는 성품에 있어서도 누구나 참 좋은 반려견이라는 말을 듣게 해주는 아이였다. 

 오스트리아의 환경 상, 강아지 놀이터에서 다른 반려견들과 어울릴 기회가 많은데, 뒤섞여 노는 아이들 틈에서도 수지의 행동과 태도는 단연 돋보였고, 나는 다른 반려인들의 부러움을 사는 개엄마었다.

 수지는 사람과 반려견들 모두에게 상냥하고 친절한 강아지였다. 가끔 반려견들이 한 마리 강아지를 소위 '다구리' 를 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그 사이에서 수지는 멍멍 짖으며 아이들을 말리곤 했다. 사교성이 떨어지는 강아지들이 어울리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 때에도, 먼저 다가가 무리로 끌고 오는 것도 수지의 장기였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어린 강아지들이 심하게 까불어 성견들에게 혼이 날때도, 수지는 끝까지 강아지들의 깐죽과 도발을 참는 아이였다. 

 자기 강아지가 다른 반려견과 이렇게 잘 노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며 감동받는 다른 반려인 앞에서, 나는 우쭐함과 자랑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모범생 엄마였다. 어쩌면 낯가리고 사회성이 부족한 나와 다른 수지의 모습에서 대리만족을 느낀 일지도. 

 개딸을 향한 그 대단한 자부심은 최근까지 유효했었다. 이제는 과거형이 되어버렸지만.


  얼마 전 강아지 놀이터에서, 나는 처음으로 수지의 나쁜 짓을 보았다.


 여느 때처럼 한 바퀴 산책을 하고 강아지 놀이터로 향했다. 날 좋은 오후 시간이라 수지와 비슷한 사이즈의 구면인 강아지들이 여럿 놀고 있었다. 보통 때 같으면 수지도 아이들과 어울려 놀텐데, 그날 따라 공을 내놓으라며 세상 떠나갈 듯 짖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이 있을 때는 장난감을 잘 꺼내주지 않지만, 전에같은 아이들이 있을 때 공놀이를 한 적도 있고 해서 테니스 공을 꺼내주었다. 그런데 이녀석, 공을 물고 가더니 다른 강아지 앞에 내려놓는 것이 아닌가. 수지는 천연덕스럽게 공 앞에 앉아 있고, 상대 강아지는 공이 갖고 싶은 듯 수지 눈치를 보고, 나는 그러면 안돼 라고 말하며 수지에게 다가가던 그 순간. 상대 강아지가 공을 입에 물었고, 기다렸다는 듯 싸움이 벌어졌다. 

 다행이 둘 다 기싸움만 벌였을 뿐 이를 드러내놓고 싸우진 않아 다친 곳은 없었지만, 그 싸움의 원인은 명백히 우리에게 있었다. 수지를 탓할 것 없이 공을 꺼내준 나의 잘못이지만, 그보다 앞서 내 아이의 처음보는 '나쁜 짓' 에 충격을 받았다. 쌍방과실도 아닌, 명명백백하게 싸움을 거는 모습을 내 눈으로 목격하게 된 것이다.

 동물의 습성이야, 동물의 야생성이야 라고 말한다면, 만 사년이 넘게 한 번도 보지못했던 그 야생성이 왜 지금 발현되는 것인지. 나이스 독이라는 말을 이름처럼 듣고 살던 아이였는데. 다른 아이들이 패싸움을 할 때도 무리에 끼지 않았던 아이인데. 

 내 아이가 나쁜 아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여러 방면에서 나에게 여러가지 숙제처럼 다가왔다. 


 사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전, 수지는 이미 전조를 보였었다. 이유없이 떼를 부렸고, 바깥소리에 예민했었다.

 집에서는 밖에서보다 훨씬 순하던 아이가 어련히 산책 나갈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빨리 나가지 않는다며 힝힝 콧소리를 내며 울고 다니고, 어련히 챙겨주는 밥과 간식 앞에서도 괜히 빨리 내놓으라며 앞발질을 해대곤 했다. 내 겨드랑이 아래 팔베게를 하고 잠들던 아이가 옆에 오는 것을 거부했고, 아침에 눈을 떠보면 밤사이 내 옆으로 와 잠들어 있곤 했다.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것에도 흥미를 잃은 듯한 모습도,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다.  소소한 변화들은 느끼고 있었지만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던 중, 그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수지는 그동안 계속해서 사인을 보내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별일 아니야' 라고 치부했던 건 나의 선택이었을 뿐. 


 수지의 나쁜 행동은 나의 잘못이었다. 


 내 아이는 언제나 착할 것이라는 나의 그릇된 믿음이 나의 잘못이었다.


 '나는 마음이 아파' 라고 말하는 아이의 사인을 무시한 것도 나의 잘못이었다.


 아이의 사인을 읽지 못한 건, 언제나 내 아이는 착할 것이라는 나의 자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개엄마이기 때문에 한 번의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는 이 문제는, 육아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우리 아이는 안그래요' 

 나는 그 말을 하지 않는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착한 내 아이가, 나쁜 행동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 그 자체가 엄마들에겐 용기가 필요할 수 도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수지를 통해 배웠다. 

 내 아이는 나쁜 행동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나쁜 아이라는 뜻은 아니다.

 한 번의 실수일 수도 있고, 우발적 사고 일 수도 있다. 

 나쁜 행동을 했다고 해서 나쁜 아이 취급을 해서는 안되지만,

자기반성이 따르지 않는다면 나중엔 정말로 나쁜 아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한창 신경전이 붙었던 두 강아지를 떼어내고 상대 반려견 엄마아게 사과했다. 당연히 공은 압수되었다. 상대 강아지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 듯, 벤치에 올려둔 내 가방을 뒤져 수지의 플라스틱 물그릇을 잡아 흔들었다. 상대 반려인은 그것에 대해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다친 아이가 없었기에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던 사고였지만, 아직까지 그 충격와 마음의 상처는 쉽게 회복되지 않는 듯 하다. 하지만 그동안 훌륭했던 수지가 나의 자식이었듯, 나쁜 행동을 하고 난 뒤 지금의 수지 역시 여전히 나의 사랑스러운 자식이다. 그동안 모범생의 엄마로 살게 해 주었던 수지에게 감사해야 할 뿐. 수지는 나에게 '엄마' 역할에 대한 과제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 쓰는 동안 잠든 수지의 얼굴은 너무나 사랑스럽다. 요즘도 여전히 조금 까칠하고 우울해 보이지만, 이제는 내가 수지의 마음은 읽어보려 노력한다. 지난 사년 간 수지가 나에게 그러했듯. 4월인데 아직 집안 공기가 차다. 웅크리고  자고 있는 수지에게 담요를 덮어주러 일어서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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