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만 원짜리 수업료
"석헌아, 가자고 있는 거 다 던져?"
"네?"
"다 던지라고 바보야. 알았지? 지금 던져라."
"왜요?"
"자세한 건 퇴근하고 연락할게."
"네, 저 지금 외근 중이라서요 들어가서 확인해볼게요."
"들어가자마자 꼭 해라."
"네. 차장님."
인도네시아로 출장 간 이 차장님에게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무슨 영문인지 설명이 없어서 다급한 이유는 알지 못했기에 그냥 확인해보겠다는 답변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날은 하루 종일 에이전시 3곳을 차례로 돌아야 하는 날이라 회사로 북귀해서 주식창을 열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주식보다는 당장 눈앞에 있는 일들을 해결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삼성동 에이전시에는 공장에서 일어난 사고를, 역삼동 에이전시에는 랩딥이 거절된 사유를, 서초동 에이전시 TOP샘플을 발송해야 하는 업무를 어떻게든 해야만 했던 것이다.
업무를 다 마치니 퇴근 시간이 1시간 30분이나 지나 있었다. 회사로 복귀할 체력은 남아있지 않았고 하루 늦는다고 주식이 0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곧바로 퇴근했다. 퇴근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다시 차장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아까보단 차분한 목소리였다.
"네, 차장님."
"어, 팔았니?"
"내일 팔려고요. 저 직퇴(외근 갔다 바로 퇴근을 줄인 말) 했어요."
"....... 그래 고생했다. 그럼 내일 아침에 9시 되면 무조건 파는 거다."
"네~. 피곤하실 텐데 쉬세요. 오늘 다행히 3건 다 잘 처리했어요."
"그래. 고생했다."
다음 날 아침, 1시간 일찍 출근해서 PC로 주식 사이트에 접속했다. 여태 빨간색만 보던 주식 창이 오늘은 파란색으로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무슨 일이 있나. 증권 뉴스 하나를 클릭하려던 순간 휴대폰에 알람이 울린다. 김대리의 회의 시간 공지 알람이었다. '금일 오전 9시 유전무님 주간 회의.' 아차, 차장님이 해외 출장 중이니 내가 대타로 회의에 참석해야 했다. 주식 창을 닫고 급히 주간 회의 자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 웅, 우~~~~~웅."
회의 시간에 차장님에게 또 전화가 걸려왔다. 휴대폰을 진동으로 해놨기 망정이지 벨 소리로 해놨으면 큰일 날뻔했다. 일단 휴대전화 옆에 버튼을 눌러서 일단 전활 끊었다.
"네, 다음은 영업 3부 주간 보고입니다."
"어 그래, 정대리. 별일 없지?"
"네, 영업 3부 주간 보고 특이 사항 없습니다."
휴, 어제 에이전시를 돌면서 3건 모두 처리하지 못했으면 아침부터 전무님 앞에서 그리고 다른 부서 팀장들 앞에서 크게 깨질 뻔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아, 주식은 안 다행일지 모르지만. 일단 오늘 아침 위기는 무사히 넘겼다.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주식 창에 접속했다. 여전히 파란색이다. 개인적으로 파란색을 좋아한다. 희망의 상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회의도 잘 끝났으니 맥심 모카 골드 한 잔 하고 다시 봐야지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탕비실로 향했다. 탕비실에 들어서는 데 웃음소리가 들렸다. 덩달아 나도 웃음이 났다.
주식 투자에 열을 올리던 시절이 있었다. 주식하면 망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 시작을 안 하던 내게 어느 날 차장님이 주식을 권유했다. 매달 부담 없이 40만 원 정도만 해보는 것 어떠냐고. 적금보다 수익률이 낫다는 말에, 차장님은 주식 10년 차 베테랑이란 말을 믿고 회사 생활 7년 만에 처음 주식을 시작했다.
사자마자 다음 날부터 오르기 시작했다. 초심자의 행운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돈을 버는 느낌이었다. 돈이 불어나고 있는 걸 눈으로 확인하니 신기했다. 신기하니 자주 들여다보게 됐다. 자연스레 주식창을 보며 웃는 시간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클레임 메일이 와도 괜찮았다. 에이전시에서 전화가 걸려와도 별일 아닌 듯 받게 됐다. 공장에서 공장장님의 불평도 불평처럼 들리지 않았다. 일이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는 주식 때문이었다. 혼자 희망 회로를 돌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계속 올라서 얼른 퇴사하는 꿈을 꿨다. 주식으로 대박 나서 하던 일을 다 때려치우는 달콤한 꿈을 말이다.
세 번째 달까지 수익은 계속 이어졌다. 차장님이 팔라면 팔고 사라면 샀다. 120만 원이 어느새 180만 원이 되었다. 60만 원의 공돈이 생긴 순간이었다. 기쁜 마음에 60만 원어치 술을 차장님께 대접했다. 술자리에서 차장님은 말했다.
"석헌, 나 믿지? 나만 믿고 하라는 대로 하면 돼."
"네 차장님. 너무 감사합니다."
10개월 연속 우상향 하던 주식은 어느 날 급하강을 시작했다. 출장 간 차장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그날부터. 그리고 다시는 반등을 하지 못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증권거래소에서 한통의 등기 우편을 받았다. 2장에 빼곡하게 적힌 글씨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유독 눈에 들어오는 두 단어는 '상장 폐지'였다.
상장폐지는 증권거래소에서 증권이 매매대상 유가증권의 적격성을 상실하고 상장 자격이 취소되는 것을 말한다. 상장 회사의 자발적 신청에 따른 경우도 있고 증권거래소가 직권으로 단행하는 경우도 있다. 나의 경우는 후자였다. 파산 등 경영상 중대사태가 발생해 투자자에게 손실을 보게 하거나 증시 질서의 신뢰를 훼손하게 할 우려가 있는 경우, 증권거래소는 투자자 보호를 위해 증권관리위원회의 승인을 얻어 상장폐지 기준에 해당하는 종목에 대해서는 상장폐지 사유가 해소되지 않는 한 일정기간(상장폐지 유예기간) 뒤에 상장이 폐지된다는 사실을 공시한다. 차장님에게 전화가 걸려온 날이 바로 내가 보유한 주식이 상장 폐지됨을 공시한 날이었다.
주식으로 돈을 조금 벌었다. 돈을 벌었던 10개월 동안 매일 꿈같은 날이었다. 그 뒤 주식은 상장 폐지되었다. 투자한 돈은 0원이 됐다. 차장님의 말만 믿고 하던 투자는 사실 불 보듯 뻔한 결말을 예고했다. 더욱이 초심자의 행운도 작용했다.
주식의 본 목적은 건전한 기업의 경영 활동을 지원해 사회를 더 이롭게 하는 데 있는데 난 건전하지 못했다. 투가자 아닌 투기를 했던 것이다. 경영 활동 지원이 아니라 내 주머니 불리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식투자는 단지 '지금 좀 싸니 투자하면 좀 먹을 것이 있겠어'라는 관점보다는 기업의 성장과 함께 주주도 같이 성장하는 모델이 가장 바람직하면서도 아름다운 모델이 아닐까 싶다.
400만 원짜리 비싼 수업료를 지불했다. 덕분에 많은 교훈을 얻었다. 운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음을 배웠고, 남들 말만 믿고 투자하면 망함을 경험했고 투자는 스스로 공부하고 판단함이 중요함을 몸소 체감했으며, 투자가 아닌 투기를 했던 10개월 동안의 내 마음을 반성했다. 아, 다 잊었는데 아침부터 막 슬퍼지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