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선 생활자의 오류 (3)
"제가 다른 건 다 자신 있는데 한 가지 딱 자신 없는 게 있어요."
세 번째 만남에서 그녀는 내가 살을 조금만 뺐으면 했다. 10kg쯤 빼고 더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고 싶다는 뉘앙스였다. 난 그녀의 모든 부탁을 다 들어줄 마음이었기에 당연히 오케이를 하는 게 맞았지만, 그녀에게만은 거짓말을 하기 싫었다. 그래서 대부분은 잘하는데 한 가지 못하는 게 다이어트라며 솔직하게 말하고 말았다.
그녀 집 근처에서 헤어지며 돌아서는데 느낌이 싸했다. 따뜻했던 그녀 표정이 갑자기 차가워짐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먼 길을 달려 집으로 돌아온 뒤 그녀에게 잘 도착했다며 안부 카톡을 보냈는데 답장이 바로 오지 않았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답장을 기다리다 그만 나도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눈뜨자마자 카톡을 확인했지만 읽지 않은 메시지를 표시하는 숫자 1은 0으로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나 아직 안 읽었어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같았다. 출근 준비로 바빠서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출근하며 난 다음 약속은 어디로 잡아야 할까, 어디로 가면 좋을까를 생각했다. 문뜩 스키장이 떠올랐다. 마침 스키장이 개장을 시작한 시기였다.
아직 읽지 않은 상태 메시지에 다음 약속 메시지를 더했다. 하이원 스키장에 가자며 분위기 파악을 못한 채 카톡을 보낸 것이다. 여태 파악한 정보에 따르면 그녀는 스키장에 다닌 지 얼마 안 됐고 아직 턴은 완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해서 이번 데이트에서 턴을 가르칠 요량으로 스키장 데이트를 제안한 것이다. 난 혼자 신나서 하이원 주변 맛집 리스트도 함께 보냈다. 그리고 나름대로 생각한 일정도 공유했다. 몸은 좀 힘들겠지만 새벽에 출발하면 당일 치기도 가능하다는 메시지와 함께.
오전 바쁜 업무에 정신이 팔려 점심시간이 다 돼서야 카톡을 확인했다. 다행히도 숫자 1은 사라져 있었고 그녀에겐 고민 좀 해보겠다는 단답의 답변이 와있었다. 고민 좀 해보겠다는 답변은 내게 승낙처럼 읽혔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옷장에서 보드복을 꺼냈다. 여기저기 얼룩이 눈에 띄었다. 내친김에 부츠와 보드도 꺼냈다. 그리고 마른 수건으로 여기저기 닦다가 이참에 커플로 장만해야겠다며 혼자 상상의 날개를 펼쳤다.
어찌 된 영문인지, 차츰 내 연락은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보낸 메시지는 그녀에게 닿질 않았다. 만나고 싶었는데 만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세 번째 만남을 끝으로 하나 둘 핑계 카드를 꺼냈다. 일이 바빠서, 친척 모임이 잡혀서, 급기야 부모님 이야기까지 등장했다.
어느 날, 그녀에게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고서야 부모님끼리 전화 통화한 사실을 알았다. 맞선을 중개한 사람을 통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화가 나 있었다. 당사자 의견은 안중에도 없이 부모들끼리 오갔던 대화는 이해 불가였고 제삼자들의 관여로 심기는 불편해졌으며 이 만남을 잠시 보류해야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제야 이 만남은 맞선으로 시작됨을 재인식했다.
연말이 다가왔다. 크리스마스는 혼자 보냈다. 가끔 전활 걸면 바쁘다며 금방 다시 전화하겠다고 하고 전화는 오지 않았다. 카톡을 보내면 이틀 뒤에 답변이 왔다. 갑자기 상황이 이렇게 반전이 된 이유가 궁금했다. 속 시원하게 이유를 알려주면 뭐라도 해볼 텐데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알 길이 없는 이유는 자책으로, 부모님의 원망으로 번졌다. 맞선으로 세 번 만났으면 결혼 이야기가 나와야는데 내 입에선 아무 얘기가 나오지 않은 것이 지금 사태의 원인이였을까, 아니면 살을 빼지 못한다는 답변이 원인이었을까. 군인 아버지가 다른 사람을 만나라고 명령한 것일까. 알고 싶어도 알 길이 없어 내 속은 계속 타들어가고 있었다. 만나면 속시원히 물어볼 텐데 카톡을 보내면 이틀 뒤에 답변이 오고 전화를 걸어도 받질 않았다. 두 번 정도 전활 받았지만 다시 전화 준다고 한 뒤 전화는 오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이런 상황이 되다니.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방법이 무엇이든 어떤 비용이 들든 감수할 작정이었다.
속상한 마음에 인천 형에게 전활 걸어 상황을 설명했더니 형은 이렇게 답했다.
"으이구, 네가 잘못했네.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도 했었어야지. 넌 선을 그렇게 봤는데 아직 멀었구나. 여잘 몰라도 너무 몰라. 쯧쯧."
새해가 밝았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작년 일은 깨끗하게 덮고 새 출발하고 싶었다. 새 마음 새뜻으로 새롭게. 그녀에게 신년 인사를 보냈다. 지금 솔직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썼다 지웠다를 100번쯤 반복하다 결국 틀에 박힌 인사를 보내고 말았다. 새해 복 많이 받고 원하는 일 이루시는 한 해가 되라고. (사실 내 속이 까맣게 탔다고, 만나고 싶고, 다시 만나면 뭐든 다 하겠다고, 살도 빼겠다고. 당신이 원하는 만큼.)
"카톡~."
기대하지 않았던 답장이 도착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빠른 속도로 그녀에게 답장이 왔다. 스마트폰 알림 창에는 그녀가 보낸 카톡이 도착해 있었다. 한껏 부푼 기대를 안고 열었던 카톡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아빠와 남한 산성을 오르는 중인데 생각나서 카톡 했다며 고맙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아빠가 살을 10kg 정도만 빼면 딱 좋겠다고 하신다고. 난 확실한 답변 대신 노력해 보겠다고 답했다. 그 뒤 그녀와 연락이 끊겼다.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도 했어야 했을까? 평소엔 밥 먹듯 하는 거짓말을 왜 그녀에겐 하지 못했을까? 거짓말을 하고서라도 그녀를 잡고 싶었던 걸까?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속사정이 있을까? 내 생각에는 오류가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