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꿈에서 내리기 싫었다

맞선 생활자의 오류 (2)

by 오류 정석헌

https://brunch.co.kr/@katarsys/127


"어제 만났던 애 어땠어?"

"괜찮았어요."

"어? 그래, 몇 번 더 만나봐."


처음으로 괜찮다는 답변을 했다. 여태까진 주로 '별로'라는 단어를 사용했었다. 갑자기 아들의 입에서 '괜찮다'는 말을 들은 엄마의 눈이 커졌다. 매번 선을 보고 별로라는 단어를 꺼낼 때면 부모님은 50퍼센트만 마음에 들면 한번 더 만나보라고 하셨지만 두 번 만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젯밤 잘 들어가셨냐는 안부만 보내고 에프터를 신청하지 않았다. 바로 에프터를 신청을 할까 말까 1시간은 고민하다가 하지 않았다. 인터넷에 떠도는 어느 연애 고수의 글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에프터는 만난 지 5일쯤 뒤에 하는 것이 효과적이라 글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머릿속엔 그녀 생각뿐이었다. 아침밥을 마시듯 삼키고 차를 몰고 출근하는 데 머릿속은 온통 에프터를 어떻게 할까 고민으로 가득 찼다. 5일을 기다리다간 내 속이 다 타버릴 것만 같았고 그녀도 떠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이대로 있다간 일도 하나도 못할 것 같아 출근하자마자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주말에 시간 괜찮으시면으로 시작한 나의 문자에 그녀는 주말보다는 평일에 보자고 답했다. 그리고 그 평일은 바로 오늘 저녁이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옛말은 이런 상황을 두고 얘기하는 것일까. 서울에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는 곳은 광장 시장이었다.


'광장 시장에서 7시에 봬요.'


금요일에 그녀와 광장 시장 데이트다. 광장 시장이라면 자신 있게 맛집 추천 코스를 짤 수 있었다. 뇌가 풀가동됐다. 여태 광장 시장을 다녔던 집들이 순식간에 떠올랐다. 일단 1차는 동그랑땡 가게로 하고 2차는 은성 횟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동그랑땡이 싫다면 자매 횟집으로 갈 백업 플랜도 세웠다.


시뮬레이션을 시작했다. 광장시장 우리 은행 앞에서 만나서 동그랑땡 가게로 가는 길에 마약 김밥과 고기전을 포장한다. 동그랑땡이 가게에서 고기가 익기 전까지 간단히 요기하고 고기가 익으면 함께 맛있게 먹을 계획이었다. 몇 번을 되돌려봤고 나의 시뮬레이션엔 한치의 오류도 찾을 수 없었다.


7시에 만나려면 적어도 5시 30분에는 회사에서 나가야 했기에 난 4시쯤 외근을 핑계 삼아 에이전시로 향했다. 에이전시 업무가 끝나고 직 퇴를 염두에 둔 계획이었다. 계획은 이상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고 난 약속 장소에 6시 30분에 도착했다. 설레는 마음을 30분 동안 느낄 수 있다니, 30분이 전혀 지루하지 않게 느껴졌다. 친구들과의 약속은 1분이라도 늦으면 화가 치밀어 오르던 내가, 달라졌다.


누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고개를 돌려 돌아본 그곳엔 천사가 한 명 서있었다. 너무 반가워서 껴안고 싶었지만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약속한 장소로 안내를 시작했다. 계획했던 플랜 그대로 오전 내내 시뮬레이션했던 그 장소로 익숙하게 이동했다.


"어머, 여기 너무 맛있어요. 우리 소주도 한 잔 할까요?"


맛집에선 누구도 무장해제가 된다고 했던가. 예상치도 못한 소주라는 단어에 나는 뛸 듯이 기뻤다. 그도 그럴 것이 주먹 고기를 빨갛게 양념한 동그랑땡을 그냥 먹기에는 뭔가 2프로 부족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간절히 바라던 단어를 귀로 듣자 내 몸은 즉각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냉장고로 향했다. 이모님께 주문을 해야는데 주문보다 내 움직임이 더 빨랐던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군인이었다. 그녀는 막내딸이었다. 막내딸은 예쁘다는 공식은 정말 맞는 말이었다. 해외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한국만 아니면 어디든 괜찮다는 그녀에게 난 그러자고 했다.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는 어떠냐고 물었더니 좋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베트남과 인도네시아엔 지금 다니는 회사의 자사 공장이 있기에 자연스레 해외 공장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소주 한잔이 두 잔 되고 세 잔 되고. 분위기는 점점 달아올랐다. 그녀의 주량은 한 병이라고 했는데 이날 둘이서 세 병을 마셨다.


어느새 시간은 밤 10시가 되었다. 난 2차로 점찍어둔 은성 횟집 쪽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따뜻한 국물로 든든하게 채워 보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녀 얼굴에서 피곤한 기색을 읽었다. 그녀는 11시 전에는 집에 들어가야 한다며 안 그랬다간 불호령이 떨어진다는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그리고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고 했다. 난 싫다고 했다. 마음속으로. 어떻게 집까지 가냐고 물었더니 지하철로 가면 된다며 어색하게 오른손을 들어 굿바이 인사를 건넸다. 그녀의 오른손을 덥석 잡고 싶었는데 잡지는 못하고 아쉽지만 이만 들어가시라고 했다.


광장시장 입구로 걸어 나와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지하철 입구에 거의 다 왔을 때쯤 택시 한 대가 길가에 정차했다. 마치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줘하는 것 같았다. 택시 문이 열리고 승객이 내린 열린 문으로 기사님께 말했다.


"기사님, 성남이요."


기사님, 성남 가능할까요도 아니고 성남이요라고 했다. 무조건 가야 한다는 무언의 마음을 담아서. 계획에 없는 나의 행동에 당황한 그녀와 택시를 함께 탔다. 종로에서 성남까지. 그것도 금요일 밤에. 편도로 2시간은 족히 걸릴 테고 택시 요금은 4만 원을 넘을 테지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를 태운 기사님은 막히는 금요일 밤 차들을 피해 요리조리 운전을 시작했다. 택시를 타고 짧은 단답형 대화로 어떡하든 어색함을 만들지 않으려 10분쯤 노력했을까. 그녀가 꾸벅 졸기 시작했다. 고개가 살짝 정면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취기는 그녀를 오른편 쪽 창문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바로 그때, 난 과감히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내 얼굴과 그녀 얼굴까지의 거리는 겨우 10cm로 가까워졌다.


"기사님, 천천히 좀 가주세요."


난 이 꿈에서 내리기 싫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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