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류 Dec 10. 2024

과대평가 말고 과소평가로 부탁드립니다

내 몸 메타인지력

"코치님, 저 생각보다 엄청 약해요. 그러니 과대평가 말고 과소평가로 부탁드립니다."


두 번째 PT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트레이너에게 이렇게 말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외형만 보고 트레이너 선생님이 사뭇 기대한 것을 실망시키지 않으려는 것, 그리고 내가 조금이라도 운동을 지속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나는 늘 과대평가되었다. 타고난 목소리와 체형 덕분에 내게 과분한 일들이 많이 생겼다. 이런 목소리와 체형을 물려주신 부모님께 감사했지만, 잘 활용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가끔 야속하기도 했다.


목소리와 외형이 준 기회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목소리는 중창단 솔로를 맡게 하며 나를 예상치 못한 spotlight 기회가 찾아왔다. 솔로는 제일 먼저 노래를 시작해야 하는 사람이다. 만약 첫 음을 틀리거나 박자를 놓친다면 공연 전체가 망가질 위험이 있었다. 그 부담감이 얼마나 컸던지, 무대에 오르기 전 손가락에 쥐가 날 정도였다. 그런 날이면 손을 주무르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괜찮아, 5초만 버티면 돼.'


첫마디를 시작하고 5초만 버티면 다른 멤버들의 소리가 함께 겹쳐져 부담이 덜어진다는 걸 알았다. 그 사실을 마음속으로 수없이 되뇌며 겨우 무대에 설 수 있었다. 다만, 솔로 파트에만 집중하다 보니 노래 전체를 외우지 못한 채 무대에 선 적도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소리가 겹치는 순간부터는 내 몫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회로 나와서도 목소리 덕분에 예상치 못한 상황들을 마주했다. 목소리 덕분에 소개팅 약속을 잡는 일은 수월했다. 전화상으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상대는 친절하게 대했다. 그러나 막상 만나면 이야기가 달랐다. 아마도, 전화 속 기대를 배신한 내 비대한 체형 때문이었을 것이다.


목소리와 더불어 체형은 직장 생활에서도 '웃픈' 일들을 일으켰다. 내가 다녔던 무역 회사는 정장을 입고 근무했는데, 정장을 입으면 실제 나이보다 성숙해 보였다. 한 번은 사장님과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문이 열리자 신입사원들이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런데 그들의 시선이 사장님이 아닌 나를 향하고 있었다. 처음엔 착각이라 여겼지만, 그 이후로도 3개월 동안 신입사원들은 나만 보면 깊이 인사했다. 해마다 3월이 되면 반복되는 일이었고, 나중에는 이를 자연스럽게 즐기게 됐다.


프리랜서로 사진 촬영을 할 때도 과대평가의 여파를 느꼈다. 덩치 큰 내가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움직이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인상적으로 보였던 것 같다. VIP 촬영에서도 덕분에 유리했다. VIP는 행사보다 내 카메라에 더 집중하는 것 같았고, 덕분에 촬영은 순조로웠다. 하지만 한 번은 일을 맡겨주던 에이전시가 갑작스럽게 영상 작업을 제안했다. 한 번도 처음부터 끝까지 영상을 맡아본 적이 없다고 설명했지만, 에이전시는 괜찮다며 설득했다. 결과적으로 첫 시도는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이후 같은 요청들이 계속 들어왔고, 실패를 반복하며 한계를 느끼게 됐다.


과대평가는 약이 되기도, 독이 되기도 했다. 일이 잘 풀리면 약이 되었지만, 잘못되면 독으로 돌아왔다. 특히 상대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을 때, 그 실망감이 나를 괴롭게 했다. 그런 경험들은 점차 나를 사람들과의 거리감 속으로 밀어 넣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떠날 때만이 자유로움을 느꼈다. 도망과 도피는 기대의 무게를 피하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도망과 도피를 그만두고 싶었다. 그래서 솔직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솔직함은 균형 잡힌 삶을 위한 중요한 전략임을 몸소 겪은 셈이다. 책 <<도파민네이션>>에서도 강조했듯, 사실대로 말하는 것은 중독에서 벗어나고, 자유를 찾는 데 필수적이다. 나는 이제야 이런 솔직함이 내 삶에 얼마나 필요한지 깨닫는다.


여전히 나는 과대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을 쓰며 과대평가해 준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별것도 아닌 나를 높게 평가해 줘서 고맙다고. 그리고 그때의 기대를 채우지 못한 점에 미안했다고. 언젠가 그 기대에 보답할 날이 오면, 꼭 보답해야겠다는 다짐도 한다.


‘과대평가 말고 과소평가로 부탁드립니다.’라고 솔직히 이야기했더니 좋은 일이 생겼다. 일이 없어졌다. 덕분에 시간이 남아도는 지금, 나의 진짜 모습을 천천히 마주해 볼 수 있는 시간을 얻었다. 앞으로도 매 수업 시작 전에 PT 코치님께 반복적으로 말할 생각이다. 반복해서 말하다 보면 언젠가는 코치님도 보이는 데로 가 아니라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까.


"오늘도 과대평가 말고 과소평가로 부탁드립니다."

 



2024년 출판 평론 우수상 수상작을 만나보세요.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3585667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