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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처음 독서 모임, 삼천포

책과 친근한 사람으로 변화하기 시작

by 오류 정석헌



책의 힘은 크다. 책에 대해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던 사람을, 이번 생이고 다음 생이고 간에 책은 나와 전혀 인연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 책 근처에도 가지 않던 사람을, 이젠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사람으로 변하게 했다. 심지어 독서하는 것을 수면제 대용으로만 생각했다. 냄비 받침 정도로만 생각했던 사람을 매주 낮술에 취해 살던 사람을 이제 삶의 중심을 잡고 사는 사람으로 변화시켰으니 말이다.


「독서 천재가 된 홍대리」를 읽고 책에서 시키는 대로 독서모임에 참석했다. 술만 주구장창 마시러 다니던 사람이 독서 모임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상황이 펼쳐졌다. 독서 모임 장소는 강남역 토즈였다. 어느 금요일 저녁에 진행된 독서 모임의 이름은 <삼천포>였다. 친구 선진의 소개로 들어간 독서 모임이고 첫 참석이라 늦지 않으려고 칼퇴하고 서둘러 갔다. 약속 시간 전에 도착한 그곳에 5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독서 모임에 관해서는 단 한 마디도 물어보지 않고 참석한 터라 궁금한 것 투성이었다. 강남역 어느 빌딩 5층에 도착해 모임 장소에 도착해서는 고개 숙여 크게 인사했다. 마침 선진이 먼저와 있어서 다행이었다. 처음이라 엄청 긴장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편안한 표정이었다.


고등학교 연극반 동아리 회원이 주축으로 구성된 삼천포 독서 모임의 회장은 욱인이었다. 고등학교 후배들을 모아서 시작한 것이 ‘삼천포’ 독서회의 첫 출발점이었다. 참석자 대부분이 연극배우들이라 그런지 외모들이 아주 수려했다. 젊음 친구들답게 에너지는 넘쳤고 웃음 또한 끊이질 않았다. 특히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혜주가 입을 열 때마다 빵빵 터졌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도 나는 전혀 웃지를 못했다. 혹시 책에 대해 물으면 어떡하지,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책을 다 읽지도 못했는데 이런저런 생각으로 조마조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책에 대한 내용은 물어보지 않았다. 단지, 책에 어떤 부분이 좋았는지 읽고서 어떤 느낌과 생각이 들었는지 등의 이야기만 오갔다. 대화에 참여하긴 했지만 의견을 말하면서도 내 이야기가 두서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책과 거리두기 하며 살아왔던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구나 싶어 창피함이 몰려왔다.


책과 관련해서는 나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읽긴 읽었지만,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내가 했던 생각들이 맞기는 한 건지 마음이 복잡했다. 최대한 잘 읽어내려고 노력한 정도라고 표현하는 게 맞겠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시간은 어느새 훌쩍 세 시간이 지나가 있었다.

모임 후 뒤풀이가 이어졌다. 긴장을 너무 했는지 허기가 져 허겁지겁 치킨과 맥주를 먹었다. 그제야 긴장이 풀리고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생각 이상으로 독서 모임이 재밌다고 느꼈다. 첫 모임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다음 모임이 기다려졌다.


첫 독서 모임의 의미는 그저 책 읽는 모임에 참여한 것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뭔가 큰 성과를 낸 듯 기분이 좋고 뿌듯했다. 왜 지금까지 이러한 세계가 있는 줄 몰랐을까. 길에 스치는 간판 하나하나도 문장으로 읽히고 새롭게 다가왔다. 세상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기분이었다. 여러 형태의 모임에 참석했고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그럼에도 독서 모임의 설렘은 잠시였다. 일하는 낮 동안 고정된 패턴에 맞춰 살다 보니 무료한 일상은 계속 반복됐다. 출근과 퇴근, 퇴근 후 회식. 지루한 일상이 그리 반복될수록 독서 모임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달력을 보니 다음 달 독서 모임까지는 아직도 10일이나 남았다. 회사 사람들 말고 새로운 사람들이 만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독서 모임 회장인 욱인에게서 카톡이 왔다.


"오빠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책 한 권 추천해요."


욱인이 추천해준 책은 「습관 홈트」였다. 내게 변화를 가져다준 책과의 인연은 사람을 통해 또 한 번 이어졌다.


욱인이 추천한 책을 사러 퇴근 후 교보 문고에 들렀다. 교보 문고 출입문을 열자 새 책 냄새가 나를 반겼다. 사람들은 각자 서서, 휴식 공간에 앉아서 책에 열중하고 있었다. 혼자 온 사람, 가족과 함께 온 사람, 연인끼리 온 사람들, 퇴근 후에도 책을 사러 오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바라마지 않던 꿈 꾸던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습관 홈트」는 보통 사람들의 실천과정과 변화를 담고 있는 책이었다. 책의 띠지에는 '하루 두 쪽, 하루 두 줄, 팔 굽혀 펴기 1개'라는 글과 카톡으로 시작하는 보통 사람들의 습관이라 적혀 있었다.

아니 습관 들이는 데 고작 ‘하루 두 쪽’ 읽기라고? 겨우 ‘하루 두 줄’ 쓰기라고? 기껏해야 ‘팔 굽혀 펴기’ 1개라고? 이 정도라면 나도 충분히 할 수 있지 싶었다. 호기롭게 마음을 먹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마음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서점 매대에 있는 책을 볼 때만 해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는데 서점을 나오면서 의구심마저 들었다.


'근데, 이 정도 해서 될까?

스멀스멀 올라오는 부정적인 생각을 잠재우고 “일단 해보기나 하자”라고 결단을 내렸다. 저자가 이렇게 책을 쓴 데는 이유가 있겠지'라며 애써 나를 다독였다.


그렇게 하루 두 쪽 책 읽기를 시작했다. 정말 놀라운 건 두 쪽만 읽으려고 시작했는데 절대로 두 쪽만 읽는 날은 없었다는 것이다. 고작 두 쪽 읽으려고 시작했는데 두 쪽이 열 쪽으로 스무 쪽으로 늘어나는 상황이 벌어졌다. 나 스스로를 돌아봐도 신기하고 대견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광화문 교보 문고 앞에 있는 글귀다. 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힘이 있는 존재일지 모른다. 서점에서 값싸게 팔리고 있고, 도서관에서 공짜로 빌릴 수 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다가올 수 있다. 사소해 보이지만 인간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다. 책을 읽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들고 독서 모임에 나가게 만들었다. 평소에 하지 않던 서점을 내 집 드나들 듯하게 만드니 말이다.


독서모임 ‘삼천포’는 다행히 삼천포로 빠지지 않고 책과 친근한 사람으로 나를 변화시켰다(변화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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