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익숙하지도, 낯설지도 않은
<2>
결국 나는 혼자 떠났다. 혼자였기에 예산도 아낄 겸, 그리고 많은 사람들도 만날 겸 타이페이 시내에 한 호스텔을 예약했고, 생각보다 저렴한 숙소 가격에 꽤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나름의 외국 여행에 그래도 설렜고 약간은 기대되기도 했지만, 나는 여전히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은 채 그저 무작정 떠났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공항의 공기는 여전히 설렜다.
대만 송산 공항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한 것은 핸드폰 심카드를 산 일이었다. 아무 정보도 계획도 없이 온 내게 핸드폰 심카드를 사는 일만큼 중요한 일도 없었다. 공항 유리문으로 보이는 바깥 햇살은 따뜻해 보였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투른 영어지만 자신감 있게, 그리고 열심히 설명해 주려고 하는 심카드를 파는 직원을 보면서, 대만으로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따뜻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을 때 느껴지는 안도감이랄까.
그렇게 공항을 빠져나와 호스텔을 찾아가는 길에 만난 사람들은, 열이면 열 다 친절했다. 송산 공항은 타이페이 시내 가까이 위치해서 시내로 가는 길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지만, 지하철에서 내려 우리 호스텔을 찾아 가는 길은 조금 헷갈렸다. 그러나, 내가 캐리어를 들고, 구글맵을 켜며 헤매려고 할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May I help you?"
라고 말을 걸어왔고, 진심으로 호의를 베풀어줬다. 대만이 더더욱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이 대만은 사람들이 너무 친절하고 순수해서 계속해서 찾게 되는 나라인 거 같다라고 할 때마다 갸우뚱했던, 사람들이 뭐 얼마나 그렇게 친절하고 착하길래 그게 그 나라를 다시 찾게 되는 가장 큰 이유가 되냐고 의문이 들었었는데, 그들이 했던 말이 충분히 이해되는 경험들이었다.
그렇게 겨우 찾아간 호스텔에서 짐을 풀고, 발레 클래스를 갈 준비를 했다. 외국 여행을 갈 때마다 그 나라의 발레 클래스를 듣는 건 나의 로망이자 습관이었다. 대만에 오기 전에 미리 인터넷에서 찾은 발레 학원이 마침 내가 묵던 호스텔에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었기에 커피나 한 잔 하고 발레를 갈 요량으로 채비를 갖춰 나섰다. 쨍쨍한 날씨가 나를 조금 활기차게 만들었다. 깨끗한 공기는 아니었지만, 그 해 가장 심한 한파가 지속되던 서울이었기에 따뜻한 기온만으로도 고마웠다.
다행히 그 근처에서 내 취향에 맞는, 마음에 드는 카페를 찾을 수 있었다. 약간 쌉쌀한 커피 맛에 몇 개 없는 테이블, 그렇지만 오래 앉아 있어도 누구 하나 눈치 주는 이는 없는 곳이었다. 와이파이가 되지 않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여행지에서의 여유를 더욱 느끼게 해주는 곳이었다. 종업원들이 영어를 하지 못했지만, 전혀 문제될 것은 없었고 오히려 그래서 미안해하며 더더욱 친절했다.
나는 한 자리를 차고 앉아 다이어리를 꺼내 무언가를 써보려고 했지만, 딱히 쓸만한 것이 생각나지 않아 그저 통유리로 밖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서울과 다름없이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서울에서도, 그리고 타이페이에서도, 익숙함도 낯설음도 별로 느끼지 않고 있는 나 자신이 조금 우습기도 하고 요상하게 자랑스럽기도 했다. 내가 있던 곳에 대한 그리움도, 새로 온 여행지에서의 설렘도 없었다. 문득 이 무미건조함을 즐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왜 그렇게 슬픈 사랑 노래만 듣느냐고. 그런 감정을 즐기는 게 아니냐고. 그런데 그렇게 물은 몇 안 되는 그 사람들은 공교롭게도 결국 슬픔이라는 감정을 나에게 느끼게 한 이들이었다. 정말 공교롭게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미 없는 생각들과 함께 커피 한 잔을 비워내고, 시간에 맞춰 발레 클래스를 들으러 일어났다.
"Thank you!"
더욱 청량한 인사를 남기고 나온 것은 꼭 외국이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나는 발레 클래스를 가는 시간이 항상 그렇게 즐거웠다. 한 시간 반 동안 난생 처음 중국어로 진행되는 발레 클래스를 하고 나는 썩 기분이 들떴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보다 더 벅찬 느낌이었다. 여행지에서의 발레 수업은 언제나 나를 흥분시키는 무언가가 있었기에 그래서 더욱 이 특별한 의식 따위의 것을 계속해서 해나가는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에너지를 얻었다.
발레를 마치고 나오니 이미 해가 다 지고 캄캄한 저녁이었다. 이상하게 여행지에서는 그리 자주 배가 고프지 않은 나는 이제 와서야 오늘 저녁에 무얼 할지 뭘 먹을 지 고민하고 서 있었다, 미처 땀이 다 마르지도 않은 채로. 딤섬을 하나 사들고, 길거리를 걸었다. 서울과 다르지 않게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고, 밤 늦게까지 안전하다는 얘기와 똑같이 치안이 안전해 보였다. 비록 8시밖에 안 됐었지만,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해가 지고 나면 여자 혼자 아무 걱정 없이 다니는 건 힘든 일이기에 더더욱 대만에 대한 호감이 늘었다. 대만에서 먹는 딤섬은 그 맛 또한 뭔가 다른 거 같았다.
그 때 꽤 멀지 않은 곳에 타워가 보였고, 그건 호스텔에서 쓱 보았던 여행 책자의 타이페이101이었다. 내가 묵고 있던 호스텔 또한 그 이름을 따서 포모사101 이었기에, 그 타워임이 분명했다. 타이페이101을 오늘의 목적지로 급하게 결정하고는, 내 특유의 씩씩한 걸음으로 목적지로 발을 옮겼다.
타워 위에서 내려다 본 타이페이의 야경은 예상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일 것이다 따위의 수식어가 붙을 만큼의 아름다움은 아니었지만, 야경을 보고 있자니, 정말 여행지에 온 것 같아 좋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감정을 공유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잠시 동안 옆의 아무에게나 말을 걸어볼까도 생각했다.
'정말 예쁘지 않냐고. '
여행지에서는 원래 가끔 그런 이상한 행동이 이상하지 않게 느껴지기도 하니 말이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사진으로라도 그 야경을 차곡 차곡 담았다. 사진을 많이 찍는 편은 아니지만, 후에 보고 싶어질 것만 같은 야경이었기에. 그렇게 한 켠은 외롭게, 하지만 외로워서 전혀 슬픈 것은 아닌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왔다. 충분히 벅찬 첫 날 밤이었다.
호스텔에 돌아와 리빙룸이라 불리는 공동 공간에서 다음 날 갈 만한 곳을 핸드폰으로 검색하고 있었다. 하나 둘씩 모인 각국의 게스트들은 '타이페이 여행' 이라는 공통 주제 속에 쉽게 친해졌다. 잘 웃고 예의 바른 미국인 타일러는 특히나 모두에게 친절하고, 먼저 다가갔다. 대만에 여자 친구가 있어서 놀러 왔다는 그는 꽤 오래 이 곳에 머무른 듯 했다. 서로 그 날의 일과를 공유하다가 나의 발레 클래스 수업 이야기에 그는 여기서 발레 클래스를 갔다는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며 신기해했고, 그 기분이 꽤 좋았다.
한국에서 영어 선생님을 한 적도 있다는 그는 무척 장난꾸러기였다. 진주에 살았었다는 그에게 왜 서울에 있지 않고 진주에 있었냐고 하니 지금 진주를 무시하는 거냐며 웃어 보였다. 어떤 장난을 쳐도 미워 보이지 않는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