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서운한 어느날
색난(色難)을 생각하다
누군가의 안색을 살피는 것에 익숙했던 때가 있었다. 내 아이가 세상에 나온 후, 눈 뜨자마자 품에 안고 머리에서 발끝까지 살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열이 있는지, 표정은 불편하지 않은지 살폈다. 그렇게 살핀 후에도 보고 또 봤다. 안색도, 숨결도, 살피고 또 살폈다. 그렇게 아이를 키웠다. 그렇게 부모는 자식을 키운다.
아이가 자란 지금도 아침마다 안색을 살핀다. 잠은 잘 잤는지, 재채기인지 기침인지, 평소와 다른 기운이나 모습이 있는지, 의식하기도 전에 파노라마 스캔이 완료된다.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다. 저절로 살펴지는 것이다. 아이를 바라보는 나의 안색은, 거울을 보지 않아도 예상할 수 있다. 행복한 표정에 온화함은 넘치고 남음이 있으리라. 부모님을 대하는 나를 생각해본다. 유구무언이다. 아이를 살피는 마음과 너무나 다르다. 그런 나를 대하는 부모님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요즈음 첫째가 중간고사 준비에 한창이다. 얼굴에 긴장이 가득하다. 아이를 부르면, ‘네~’하고 대답하며 달려오던 녀석이, ‘왜요!’ 하고 소리만 보내는 일이 잦아졌다. 이해는 되지만, 괘씸함이 쌓여간다. 주말 평화로운 아침 식사 후, 물어볼 것이 있어 첫째를 불렀다. 이번에도 ‘왜요!’ 하고 돌아보는데, 이마에 내 천(川) 자가 박혀 있다. 20%의 verbal과 80%의 non-verbal로 근거 없는 버릇없음을 표현한 큰 아들은, 예의도 없고 배려도 없고 될 성 부른 싹은 더욱 없는 녀석이라는 잔소리의 포화를 받아야 했다. 시험을 앞둔 예민한 마음을 잘 알지만, 도를 넘었다 싶어 큰소리를 내고 말았는데, 아들의 표정에 생각이 많아진다.
그 모습이 마음 깊이 박혀 버렸다. 내 모습을 본 것 같다. 저런 표정이었겠구나. 부모님께 100% 집중하지 못했던 나의 표정이 저러했으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온다. 이런 마음이셨겠구나. 네 마음 이해하지만 보는 내 마음 서글픈 것도 사실이다. 두 분은 어찌 변함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셨는지 먹먹해진다. 불혹이 지나서도 ‘당해 보고 서야’ 내가 저지른 괘씸함을 깨닫다니, 불을 만져 보고야 뜨거움을 아는 철부지와 무엇이 다른가 싶다.
아이의 표정은 평안하지 못한 마음에서 연유한다. 아이가 애써 불안함을 감춘 들, 내 모를 리 없듯이 부모님 또한 그러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 삶을 평안하게 잘 일구어 가야 한다. 나를 위한 그 길이 부모님을 위함이 되어주다니, 자식을 아끼는 부모의 마음은 놀랍다. ‘너만 괜찮으면 된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내가 아이의 안녕을 바라듯 부모님도 내 마음에서 평안한 안색을 바라고 원하시는 것이리라.
평안하고 온화하게 부모님을 대하는 것은 시작이자 마무리일지 모른다. 돌아보면, 부모님께 용돈을 아니 드려서, 함께 나들이를 가거나 식사를 하지 않아서, 혹은 버릇없는 행동을 해서 내 마음이, 두 분 마음이 무거웠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마음이 개운치 않거나, 불만이 터진 순간에는 나의 불편한 안색이 있었으리라. 마주한 자리에서도 이야기가 반복되거나 길어질까 짐작하여 안색이 바뀌고, 내 자식 생각, 일상다반사 걱정에 부모님께 집중하지 못했던 순간들은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났을 것이다. 아이에게는 끊임없이 내어주던 정성과 시간, 그 한 줌이라도 부모님께 내어 드렸던가 되짚어 본다. 커다란 떡 한 덩이, 명치에 박힌다.
내 아이에게 서운한 오늘, 내 부모를 서운하게 한 어제들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