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작가님들의 글 중에서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학생의 인권은 깡그리 무시당한 채 자행되던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던 학창 시절에 대한 글들을 꽤 심심치 않게 읽어볼 수 있다.
나 또한 선생님들이 행한 폭력에 그대로 노출되었던 세대이다. 그 시절에는 맞으면서 학교 다니는 게 당연했었고, 대부분의 학부모들 또한 '학생이 맞았으면 이유가 있으니 선생님이 때렸겠지'라고 치부하고는 했었다.
지금 같았으면 말도 안 되지만 그 시절에는 그랬었다. 그렇지만 모든 선생님들이 마냥 아이들을 때리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학창 시절에 만났던 수많은 선생님들 중 유독 내 기억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고3 때 정치선생님은 내가 만난 선생님 중 단연 최고인 분이었다.
내가 다녔던 여고는 지역에서도 명문으로 꼽히는 학교였고,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배출해서 딸을 키우고 있는 집이라면 누구나 보내고 싶어 하는 학교였다.(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다니던 시절에는 그랬었다)
당시 우리 학교에는 성인이 된 후 선생님이 되어 모교에 발령받길 원했던 선생님들도 꽤 많은 편이었고 실제로 여선생님 중 많은 선생님들이 선배이기도 했다.
내가 고3이 되던 해 정치 선생님은 타 학교에서 우리 학교로 전근을 오셨다.
새 학기 첫 정치 수업이 시작하는 날 선생님은 큰 키에 멋진 트렌치코트를 휘날리며 우리 교실에 들어오셨고, 선생님의 옷맵시에 고3 여학생들은 일제히 '오~'라는 감탄사로 정치 선생님과의 첫 대면이 시작되었다.
정치선생님은 40대 후반 혹은 5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연세였다. 어쩌면 실제 나이보다 더 젊어 보이셨을지도 모른다.
우리 집에 같이 사는 여자가 이렇게 입혀줬다면서 머쓱해하셨던 선생님은(사모님을 항상 같이 사는 여자라고 표현하셨다) 자기소개와 함께 오고 싶었던 학교로 전근 오게 되어서 너무 좋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어졌던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제가 이번에 여고로 발령 나고 옷도 좀 샀고, 담배를 끊었어요"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항상 우리에게 존댓말을 하셨다
"우와! 정말요? 대단하신데요"
지금은 완전히 끊으셨지만 그 당시 친정아버지도 담배를 끊으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하셨기에 그게 얼마나 흡연자에게 힘든 일인지는 아버지를 통해 알 수 있었는데 우리 학교로 발령받으신 후 담배를 끊으셨다는 말에 나는 더 놀랐다.
"우리 집에 같이 사는 여자가 담배냄새나면 학생들이 싫어한다고 하더라고요. 여자들은 냄새에 민감하다며, 5년 동안 남학생들하고만 있었으니 이번 기회에 끊어보라고 해서 맞는 말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기는 한데 제가 그동안 담배를 많이 피우기는 했기에 이참에 끊었어요. 아직 한 달 밖에 안되기는 했는데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여러분에게 담배 피우지 말라고 하면서 내가 피면 그것도 웃기잖아요? 그래서 이 참에 끊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00 여고 학생들은 담배 피우는 분 없을 것 같은데요? 이렇게 훌륭한 학교에 다니는 여러분들이 담배를 피우나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학교는 쓸데없는 잔소리를 하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나요?"
"맞아요 선생님"
우리는 이렇게 대답하면서 킥킥거렸다. 그 당시 선생님은 은근히 나도 끊었으니 너희도 담배필 생각은 하지 말라고 돌려서 말을 하셨던 것이다.
이렇게 위트도 있으셨고, 낭만 있는 선생님 이셨던 걸로 나는 기억한다. 물론 우리 반의 몇몇 친구들은 정치 선생님 멘트가 너무 오글거린다고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당연히 자연스럽게 나는 정치 시간이 기다려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 반에는 선택과목으로 경제를 선택한 학생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경제를 선택한 학생은 좀 쉬거나 자도 된다고 허락하셨다.
단 코를 골거나 잠꼬대를 하는 건 금지라고 하시면서...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아이들이 정치 시간에 안 자고 수업을 들었다. 수능 선택과목이라고 학교 중간, 기말고사에서 정치 시험을 안 보는 게 아니기에 대부분 열심히 수업을 듣기는 했다.
"선생님은 정치보다는 국어 선생님이 되셨으면 더 어울렸을 것 같아요"
누구였지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우리 반의 어떤 친구가 어느 날 정치 시간에 선생님께 이런 말을 했던 건 기억이 난다.
"그런가요? 그런데 만약에 내가 국어 선생님이었다면 지금 보다 훨씬 여러분을 더 자주 만나게 될 텐데 그러면 여러분이 국어를 싫어하게 되었을 것 같은데요?"
"아닌데요"
"선택 과목 정치 선택한 사람은 손 좀 들어볼까요?"
나를 포함한 몇 명 안 되는 학생이 손을 들었다.
"왜 정치를 선택했어요? 내가 생각해도 정치 교과서 재미없는데... 경제 선생님이 더 잘 가르쳐 주지 않나요?"
선생님이 당시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나에게 질문하셨다.
"저는 경제보다 정치 문제가 더 풀기 쉽던데요. 그리고 선생님 수업 재미있어요. 경제시간이 더 졸려요"
사실이기도 했다. 나는 아무리 경제 문제를 풀어봐도 이해가 안 되었고, 상대적으로 점수도 정치와 비교해도 잘 안 나오는 편이어서 무조건 선택과목은 정치를 선택해야겠다고 이미 고2 때 결정을 했던 상태였다.
"음... 내 수업이 더 재미있다고 말해주는 학생이 있으니 저도 수업 준비를 더 철저히 해서 자는 사람이 한 명도 안 나오게끔 개그 맨트를 생각해 와야겠네요."
"선생님 개그 썰렁해요"
우리 반 몇몇 아이들이 선생님에게 종종 이렇게 말했었기에 아마도 당시 선생님이 개그를 더 재미있게 만들어봐야겠다고 하셨던 것 같다.
고3 힘든 수험생 시절을 보내면서 정치 수업이 유일하게 그 당시의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던 건 아마도 고3 담임이 너무 거지 같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정치 선생님이 더 훌륭한 선생님으로 기억되는 것도 같다.
이 부분은 친정 엄마도 인정하셨다. 내 인생 최악의 담임 선생님을 고3 때 만났다는 건 아마도 네 담임복이 거기까지인 것 같다고 하셨으니까.(입시와 상관없이 선생님의 인성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