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 살고, 뉴욕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나는 뉴욕을 배경으로 한 새로운 책이나 영화가 나오면 가슴이 마구 설렌다. 이번에 본 영화 [5 to 7] 은 정말 보는 내내 가슴이 두근두근거릴 정도로 좋았다. 뉴욕에 사는 프랑스 외교관 와이프와 연상의 유부녀를 사랑하는 젊은 미국인 작가 사이의 뻔한 불륜이라고 할 수도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뉴욕 맨해튼의 아름다운 곳곳, 특히 내가 좋아하는 장소들을 많이 담고 있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아주 훌륭한 영화였다. 스크린에 담긴 모든 곳이 뉴욕이지만 그중에서도 센트럴 팍, 구겐하임 미술관, 크로포드 앤 도일 북스토어, 파크 애비뉴의 Sherry-Lehmann 와인샵 등이 자주 등장한다. 가까이에 있어도 자꾸만 가보고 싶은 그런 멋진 장소들을 사랑이 가득 넘치는 감미롭고 아름다운 장소로 담고 있다. 특히 영화 중간중간 센트럴 팍에 놓인 벤치에 새겨져 있는 메모들을 비추어주는데 그 어떤 말로도 행동으로도 눈빛으로도 담기 힘든 사랑의 메시지를 전해준다. 함축된 한 문장의 위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영화를 통해 베레니스 말로에라는 여배우를 처음 알게 되었다. 지금 서른여섯인 이 프랑스 여배우는 과거 과거 본드걸로 유명했다고 한다. 고르고 하얀 치아를 드러낸 환한 웃음이 황홀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영화에서 그녀는 [인어공주]의 주인공과 같은 이름인 아리엘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프랑스에서 젊은 시절 댄서로 일했고 결혼을 하고 외교관인 남편을 따라 이곳 뉴욕으로 왔고, 사랑스러운 두 아이의 엄마이다. 또 한 명의 주인공 브라이언은 맨해튼의 작은 공간에 거주하며 끊임없이 사색하고 고민하고 글을 쓰고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는 순수하고 열정적인 작가 지망생이다.
잠을 자는 순간 이외에는 책을 읽고 생각하고 글을 쓰는 브라이언은 그날도 출판사로부터 퇴짜를 놓는 전화를 받고 실망감에 거리를 배회한다.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순간, 길 건너에서 담배를 물고 있는 매혹적인 한 여인을 보게 된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다. 여인도 남자를 바라본다. 애써 외면해보지만 둘은 다시 눈을 마주친다. 그리고 예전부터 알아온 사이인 듯 정답게 이야기를 나눈다. 둘의 대화를 통해 이 영화의 제목인 '5 to 7'의 의미를 알게 된다. 아리엘은 브라이언에게 호텔의 키를 주면서 매일 '5시에서 7시까지" 두 시간 동안 유부녀인 아리엘이 자유롭게 브라이언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왜 하필 그 시간이냐고 묻는 브라이언에게 아리엘은 답한다. 프랑스인들은 직장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기 전 2시간인 이 시간에 배우자의 간섭을 받지 않고 밀회를 즐길 수 있다고 설명을 했다. 남편인 발레리 또한 정부가 있었다. 친구이며 연인인 둘의 관계는 흔한 남녀 사이는 아니다. 브라이언은 같이 부모님을 만나기도 한다. 총각인 아들이 유부녀를 만나는 사실에 아버지는 당장 관계를 끊으라고 분노하지만 엄마는 "내 자식을 좋게 봐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라면 나도 당연히 그 사람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한다.
브라이언과 애이리얼의 만남이 무르익어가고 행복감과 충만감, 그리고 풍부한 인생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브라이언은 "5시에서 7시" 가 아닌 다른 시간에는 부지런히 글을 썼다. 그리고 마침내 뉴요커 편집장으로부터 책을 출판하자는 제의를 받는다. 실제 뉴요커의 편집장을 포함 뉴욕의 유명인사들이 카메오로 출연을 해서 깨알 재미가 있다.
프랑스 외교관 남편과 함께 연하 남자 친구의 시상식장에 참석하기도 하는 등 우리 정서로는 이해하기 힘든 장면들도 많이 연출이 된다. 남편도 아내도 각각 애인이 있지만 가정에 충실하며 각자의 새로운 사랑을 존중해주는 것이다. 아무리 프랑스라지만 이런 일이 실제로 흔한 상황인지는 글쎄.. 모르겠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짧은 만남에 만족할 수 없었던 브라이언은 계약금으로 받은 6천 불로 5th 애비뉴의 크리스천 디올 매장에서 다이야반지를 구입한다. 그리고 에이리얼에게 청혼을 하고 그녀는 당황한다. 그날 밤 아내가 그 일로 괴로워하자 남편 발레리는 브라이언을 찾아와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은 용인해주겠지만 가정을 깨는 것만은 안된다고 마지막 선은 지켜달라고 부탁했지 않았냐며 화를 낸다.
다음날, 브라이언은 애이리얼을 찾아간다. 그 둘의 밀회의 장소는 밀려온 바닷물에 사라진 모래성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수위는 애이리얼이 남긴 편지 한 통을 브라이언에게 건네준다, 몇 자에 걸쳐 쓴 장문의 편지를 읽는 브라이언의 표정은 굳어간다.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이며, 연락하지도 말라는 내용이었다.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은 브라이언은 뉴욕 거리를 정처 없이 헤맨다.
에이리얼이 브라이언에게 다이야반지와 함께 호텔 수위에게 남긴 편지는 단순한 이별을 통보하는 통속적인 편지는 아니었다. 둘의 만남의 순간부터, 아니 훨씬 그 이전의 한 여인으로서의 삶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진솔하게 써 내려간 그 편지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한 편의 감동적인 문학작품과도 같았다. 감동과 함께 나도 그렇게 멋진 편지나 글을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의 정서로는 이해하기 힘든 영화일 수도 있지만 퇴폐적이거나 은밀스럽거나 하지 않고 밝고 쾌활하다. 야한 장면도 없다. 영화의 소재나 포장은 불륜이지만, 두 사람의 간결하고 가식 없고 진솔한 대화를 통해, 여자로서의 삶, 사랑, 인생, 그리고 남자의 야망, 사랑, 그리고 인생을 담고 있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고요한 밤에 은은한 촛불 하나 켜놓고 와인 한 잔 기울이며 다시 보고 싶은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