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전 재미있게 읽었던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The Sense of an Ending] 를 원작으로 동명의 영화가 제작, 개봉되었다. 금지된 사랑, 자살, 첫사랑, 배신, 상처, 기억에 관한 이야기를 참 멋지고도 슬프게 담아낸 작품이다. 원작을 재미있게 읽었기에, 이 이야기를 어떻게 스크린에 담았을까 기대가 컸다. 영화는 인도 감독 리테쉬 바트라 Ritesh Batra 의 작품으로, 대표작으로는 [런치박스 The Lunch Box] 가 있다. 주인공의 이름은 토니 웹스터, 예순살에 접어들었다. 멋지고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지만 이혼을 했다. 잔소리할 아내도 없고, 이야기를 나눌 친구도 없다. 하나뿐인 딸은 싱글맘을 준비하는 임산부라 남편이 필요할 때면 딸의 보호자 역할을 한다. 그리고 가끔은 우체부를 집으로 초대해 커피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딱히 새로울 것도 특별할 것도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토니는, 학창시절에는 친구들과 어울려 테드 휴즈, T.S. 엘리엇, 딜런 토마스의 시를 읽고, 토론을 했던 문학도였다. 특히 조지 오웰과 올더스 헉슬리의 작품들을 좋아했다. 그렇게 문학과 역사를 좋아했고, 책도 많이 읽고 시인을 꿈꿨지만, 지금은 건물 귀퉁이에 아주 작은 빈티지 카메라샵을 열어 그곳에서 하루를 보낸다.
사실 이부분은 원작과 다른데, 원작에서 토니는 동네 병원 도서관에서 근무하며 책정리도 하고, 책배달도 하고, 환자들에게 읽을만한 책을 추천하는 일을 한다. 그리고 영화에서는 딸이 싱글맘이 되려고 준비중이라고 나오지만, 원작에서 딸은 이미 엄마가 되어 있고 남편도 있다. 이야기의 흐름을 크게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원작과 다르게 에피소드들이 진행된다.
여느날과 다를 것 없는 어느날, 우체부는 한 통의 편지를 건네준다. 토니는 별 이유없이 그 편지를 며칠동안 묵히게 된다. 편지를 뜯어보았다. 놀랍게도 그 편지는 대학시절, 두해 정도 사귀었던 여자친구 베로니카의 어머니 사라 포드에 관한 내용이었다. 더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녀가 자신에게 오백파운드와 일기장을 남긴다는 내용이었다. 너무나 뜻밖이고 어리둥절해서 이리저리 찾아다니며, 토니는 잊고 살았던, 잊고 싶었던 과거 속으로 들어간다. 영국 런던 중심부의 고등학교, 문학과 역사를 좋아하던 단짝친구가 셋이 있다. 어느날 지성과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카뮈와 니체를 사랑하는 친구 에이드리언이 전학을 온다. 토니는 에이드리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멋지다고 생각하고 친구가 되고싶어한다.
특히 "역사란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믿어지는 확신이다 History is that certainty produced at the point where the imperfections meet the inadequacies of documentation" 라고 한 말을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그시절 한 친구가 자살을 하고, 에이드리언은 "자살은 단 하나의 진실한 철학적 문제" 라고 했던 카뮈의 말을 인용해 깊은 토론을 한다. 그렇게 수업시간에 나눈 이야기들, 특히 역사와 영문학 시간에 나눈 이야기들이 전반부의 주된 내용이다. 그리고 넷은 대학을 가고, 모범생 에이드리언은 캠브리지로 진학을 한다. 토니는 대학에서 베로니카라는 아가씨를 사귀게 된다. 우연히 그집에서 며칠 묵게 되면서, 오빠인 잭과 어머니 사라를 만나게 된다. 어머니 사라는 평범한 친구 엄마는 아니었다. 그러다 베로니카와 헤어지고, 얼마 후 에이드리언으로부터 편지를 받는다. 베로니카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사귀어도 되겠느냐고 묻는 내용이었다.
토니는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에게 같이 편지를 보낸다. "그래 친구들아, 나 상관 말고 잘해봐라" 라는 내용으로.. 하지만 그것은 토니의 기억 속에만 남아있던 편지 내용이었다. 얼마 후 에이드리언은 욕실에서 자살을 했다. 토니는 수수께끼같은 이야기로, 미로를 걷는 답답한 마음으로 전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사실 아내는 전혀 베로니카의 존재를 몰랐다. 아내는 놀라고, 아내와 많은 이야기들이 오간다. 그리고 결국 수수께끼를 풀어줄 사람은 베로니카라는 생각에, 수소문해서 그녀를 만난다. 베로니카는 토니를 만나고싶어하지 않았다. 잊고 사는 동안 시간이 참 많이도 흘러 둘은 백발이 희끗희끗한 노년이 되었다. 서먹하기도 하고, 아직 토니에게 뭔가 맺힌 게 많은 듯 썩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토니는 멀리서 그녀를 몰래 지켜보기도 하면서, 몰랐던 가족사를 알게 된다. 그러면서 온통 이 퍼즐조각을 맞추는데 온 정신을 쏟다가 드디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베로니카와 토니, 에이드리언과 사라 포드, 그리고 그들 사이에 난 장성한 아들, 충격에 휩싸이고, 그 이면에는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실수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 실수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는 않은 법이다" 라는 말의 의미를 알게된다. 토니는 회한에 잠긴다. 오래전 잊고있던 과거로 돌아가 너무나 멋졌던 친구, 펜싱과 클라리넷과 문학과 역사와 철학을 사랑했던 친구, 자신의 생을 명철하게 직시하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던 용감한 친구 에이드리언을 떠올린다. 그리고 어찌보면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편하게 편하게 살기만을 바라며, 큰 의미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며 나이를 먹은 자신의 인생을 몹시 아쉬워한다.
한 통의 편지로 인해 잊었던 자신의 과거를 되짚어가는 토니를 통해 줄리언 반스는 우리 스스로 죽음과 인생에 대해 생각해보길 바라는 듯 하다. 그러고보면 이 작품도 반스가 늘 작품들을 통해 공유하고자했던 죽음과 깊이 연관이 되어있다. 9년 전 사랑하던 아내 팻과 사별한 이후 은둔하다시피 하며 이 작품을 완성했다. 그리고 얼마후 아내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을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에 담아냈다. 영화를 보면서 이 원작과 아주 비슷한 작품,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가 계속 생각났다. 학창시절 친구들 이야기로 시작해 오랜 시간이 흘러 친구를 찾아다니며 추억하는 내용이다. 무슨 책을 먼저 읽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분명 책을 읽으면서 이 두 작품이 참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든다면 또 어떤 느낌일까.. 집에 와서 책을 들쳐보았다. 밑줄을 그어둔 한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이란 모래에 묻힌 도시 같은 거야.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모래가 쌓여 점점 깊어지는 경우도 있고, 시간의 경과와 함께 모래가 날아가서 그 모습이 밝게 드러나는 경우도 있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원작과 달리 영화는 흥행에는 그닥 성공하지못한 것 같다. 평소 이용하는 집 근처의 큰 상영관에는 아예 들어오지 못했다. 지난번 맨해튼에 나갔을 때 보려다 시간이 안맞아 보지못하고 집에서 꽤 먼 동네의 자그마한 극장에서 보게 되었다. 예전에 [지니어스] 를 본 곳도 이곳이다. 그때도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과 함께 봤는데, 이번에는 친구인 듯 보이는 할머니 두 분과 함께 보았다.
이렇게 매번 손님이 없어서 극장이 문을 닫으면 어떻하나 걱정스러웠다. 흥행과 무관하게 좋은 작품들을 빠짐없이 상영하는 이 아담한 극장이 오래도록 남아있어주면 좋겠다. 그래도 극장이 위치한 곳은 타운의 메인스트릿이라, 아기자기한 샵들이 줄지어있고, 작지만 책방도 있고, 직원들이 참 친절한 스시집도 있다. 그리고 바로 앞에 호수도 있다. 호수의 물소리도, 하늘의 구름도, 가벼운 바람도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