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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lomonkeystar Dec 22. 2021

실패, 아니고 안식년-,

역이민은 포기하고 돌아온게 아니다.

26살이니까 가능했던 무모한 도전이었다. 3년의 패션MD생활을 하다가, 통장 잔고는 절대 늘지 않고, 아침 8시부터 9시는 기본인 삶이 너무- 싫었다. 새내기 신입사원시절에 따라잡지 못하는 업무에 혼자 자정에 가까이 되어서 집에 가곤 했던 열정이 이제 푹 식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어떤 달은 30일 중에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행사장에서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물건 판매를 위해 상자를 나르고 물건을 디피하는 일명 까대기를 했던 적도 있더란다. 


같이 데리고 나갔던 영업부 막내 둘이서, 치고패고 몸 싸움을 했다. 하- 아직도 생각이 난다 롯데 잠실점 경찰이 오고 비상이 걸렸다. 영업부를 보낼테니 일단 귀가하라는 부장님 명령에 지하철에서 눈물을 흘렸다. 정말로 나는 내 주제를 모르고 항상 목표를 높게 잡는 사람이었다. 젊었으니까. 아니 어렸으니까 가능했던 영혼을 담았던 직장생활,


겨우 토익 355점 주제에 몰래 2년 동안 준비한 전화영어만 믿고 인턴비자를 받아 미국으로 날아가버렸다. 그 누구도 믿지 않았었다. 내가 비행기 티켓을 사기 전까지는 일년 전부터 간다고 말했었는데 가족들은 가볼테면 가봐라 그냥 하는 소리겠지 라고 생각했나보다. 막상 비행기 티켓을 샀다는 말을 하자 엄빠는 꼭 가야겠냐며 말렸다. 


사실 더 이상은 이렇게 살다가는 내 자신이 싫어질거 같았다. 하루 아침에 조직이 개편되고 회사에 창립일 부터 몸담으셨던 이사님도 그렇게 타의로 나가게 되셨다. 그렇게 존경하던 많은 나의 멘토들은 정말로 "이사님 그만 두시고 어디서 떡볶이 집 하신다더라" 라고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정말 아니다 싶었다. 20대니까, 다 놓고 도전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1년의 인턴쉽을 마치고, 나는 욕심이 더 생겼다. MBA를 하고 싶었다 뭔가 남들과 다른 경쟁력을 갖고 싶었고, 경영학 석사라는 타이틀이 멋있어만 보였다. 그리고 운좋게 (추천서를 도와 주신 교수님, 사촌언니 등)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다행이 나는 조건부입학으로 입학을 허가 받았다. 


아무래도 실력이 없다보니 정-말로 힘들었다. 공부는 엉덩이 무거운 사람이 하는거라고, 나는 정-말로 공부랑 거리가 먼 사람이었는데 정말 나는 "메타인지"능력이 떨어졌다. 


거기다가 나는 미국 생활을 서포트 받을 수 있을 만큼의 집안 형편이 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금수저라고 오해하기도 했다.) 영어도 못하는 주제에- 학교 까지 한시간 반이나 걸리는 운전도 감당하지 못하는 주제에 - 매일 불안해서 집중은 집중대로 못하고, 성적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않았다.  


4배드룸 3배쓰 그리고 창고로 쓰이는 문도 없는 방에 나는 이사를 들어갔다. 월$450불 각종 공과금도 포함이라 이렇게 저렴한 집은 찾기 힘들었다. 아무튼 - 그 집에서 살면서 온갖 드라마가 있었다. 좋은 대학을 나온 4명의 룸메이트 그리고 두명은 석사학위 까지 있었는데, 영어를 배운 답시고 아 스펙이 이렇게 좋은 친구들을 사귀면 영어도 많이 늘고 좋은 친구들도 생기겠다 해서 좋아했다. 


근데 일단 안맞는게 너무 많았고, (난 정말 현지 아메리칸스타일의 하우스 파티가 싫다.. ) 영어는 정말 많이 늘었으나 거기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 나는 뼛속까지 코리안이다..  


정말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 정말 연말이면 외로워서 죽을것만 같았다. 엄마아빠 동생들 너무 보고 싶어서 다들 미국에서 사는게 훨씬 좋은 삶이다 다들 이렇게 산다. 조금만 버텨라 라고 조언했고, 귀 얇은 나는 받아들였다.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듀크MBA를 나오고 International Relationship을 공부하던, 중국인 친구 "루시" 영어도 부족하고 경영학에 문외한인 주제에 경영학 석사를 듣던 나를 정말 많이 도와 주었다.


그 다음 이사갔던 집은 "콤튼" 미국에서 가장 위험하다는 동네였다. 가격이 저렴해서 이사를 갔는데 (한참 있다 그런 동네라는걸 알았다.) 그때 엄마에게 연락을 했다 조금씩이라도 제발 도와 달라고, 한달에 $3-400불을 지원 받았다. 그리고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이사를 갔다.


그래도 감당 할 수가 없었다. 한달 기름값 보험값이면 끝나는 돈이었다. 겨우 시작한 학교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전부 야간 수업을 등록하고, 아침 7시에 출근해서 4시에 끝나는 회사를 찾았다. 학교 까지 가는 거리는 거리상으로 4-50분이었지만 캘리포니아의 출퇴근 교통체증은 나를 길에서 한시간 반을 운전을 해야했다.  


출근하게된 직장은 한국 회사 답게 미친듯한 업무량이 주어졌다. 웹디자이너로 고용이 되엇지만 매출까지 담보해야 했다. 비자 문제로 합법적으로 급여를 받을 수 없기에, 유학 비용을 위해서는 내 거의 모든것을 투자 해야 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다른 직원들의 시기 질투도 감당 해야 했고, 완벽한 영어를 하지 못하는 외국인을 무시하는 태도도 감당해야 했다. 


다행히 처음 시작했을때는 월25만불의 매출이 45만까지 올라갔기에 해고되지 않고, 졸업장을 받고 무사히 그만 둘 수 있었다. 그러나.. 졸업하고 바로 한국에 돌아가겠다는 말을 뒤로 하고 또 스멀 스멀 욕심이 났다. 이것 저것 한국말로는 "운영 디자이너 (웹/그래픽/광고/로고/ 팜플렛 등등 온갖 디자인들 하는 직무 )" 전문성이 없는 커리어 같았다. 


졸업장을 가지고 귀국하겠다고 부모님께 말씀 드렸었는데, UX디자인이 하고 싶었다. 엘에이 다운타운의 General assembly에 UX design course를 야간으로 등록하고. 또, 학비와 생활비가 필요했기에 낮엔 다운타운의 한 에이젼시에서 일을 시작했다. 주로 하는 업무는 ERP 연동이 되는 이커머스 웹사이트 디자인을 하는 직무였다. 


그리고, 이미 한국나이 30이 넘어버렸고, 왠지 한국으로 돌아오는게 너무 무서웠다. 어디서든 신입으로 채용이 안되어 밥그릇 하나 못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또 그렇게 미적 미적 거리다가 3년이 지났다.


비자 문제로 자본금도 없이 마케팅 에이젼시를 창업해 버렸다. 정말 나는 좋게 말하면 모험심과 실행력이 뛰어난 사람이고, 안좋게 묘사 하자면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 돈키호테이다. 


창업 후 2년간 숨막히게 여러가지 역할을 365일 단 하루도 쉬지 않고 하루 종일 일했다. 나는 "메타인지"가 안된다. 나의 한계를 알지 못했다. 많은 자기계발서에서 창업자는 100시간을 일하라고 했기에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내 능력의 끝을 봤다. 실무자로서 인정받던 능력은 영업,회계업무,직원관리,수금,시차가 다른 나라의 콘트렉터들을 모아 프로젝트를 이끄는일과는 정말 다른 성격의 것이었다.


회사를 시작하자마자 2주만에 스테이홈 명령이 떨어져 모든 사업체들이 쉬게되거나, 회사를 클로즈했다, 많은 사람들이 실직하는 와중에서 나는 그 패닉과 공포로 더 달리기만 했지 정말 내 주제를 파악하지 못했다.


걸려 넘어지듯 나는 고꾸라졌고, 총 8년이란 세월을 고국을 그리워만 하던 나는 감정적, 체력적으로 폭발해 버렸다. 사실 무너져 버렸다. 수도 없이 메아리처럼 고민하던 한국 행을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었다. 이번엔 미국에 더 있다가는 내가 내 자신을 싫어하게 될거 같았다. 


그리고 가족들을 보자마자 그 긴 시간의 고민은 마침표를 찍었다. 내가 진정으로 필요하고 원하는게 무었이었는지 깨달았다. 금의 환향이고 성공이고, 난 여기서 살거야. 누가 뭐라하면 어때 실패해서 돌아갔다고 생각해도 뭐 어때, 여기 제일 소중한 사람들이 있는데.


언제나 입에 달고 살던 "한국에 언제 돌아갈지 모르니까 짐많이 안만들거야" 하며 미니멀리스트를 자처하던 나는 별로 가지고 올것도 없었다. 있던 차는 처분하고, 괜찮은 물건들은 친구들에게 다 나눠주고, 운송비가 더 들만한것들은 다 처분해버리고,  화장품과 옷가지 컴퓨터만 보냈다. 그렇게 고민만 하던 귀국을 한 순간에 결정하고 나는 큰 번뇌가 해소됨을 느꼈다. 


오히려 다른 아시아권의 콘트렉터들과 같은 시간대에서 일하니 편하다. 언콘텍트 시대 덕분에 계속 캘리포니아의 고개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나에게 코로나는 악재가 아니고 호재다. 



        

때로는 이게 다라는 생각이 나를 곪게 만들고 있지는 않았을까? 


오늘도 자기전 문뜩 드는 감성으로 브런치를 접속했다. 다들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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