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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lomonkeystar Aug 24. 2022

겁도, 철도 없었던 나의 20대

다시 돌아라고 하면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 

넌 무대뽀 같다. 왜 생각없이 일부터 저지르냐 



어렸을땐 그게 비난일줄만 알았다. 내가 최고로 잘난줄만 알았던 20대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도 나는 학벌따윈 지지 않아. 열심히 꾸준히 해내면 성공할거야 티브이에 나오는 성공한 괴짜들을 보며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어른들의 조언은 그저 고리타분한 잔소리로만 여겼다. 



돈한푼없이 일을 저지르고만 다녔다. 그저 나는 젊기에 경험은 소중하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어떻게 그렇게 무모했었는지 모르겠다. 가장 중요한것을 하지 않는다는 말에도 나는 굴하지 않고, 대외활동과 학회활동, 부모 등골을 빼먹는다며 비난을 받으며한 무급 인턴 생활 다행히 졸업전에 직장을 구 할 수 있었다. 


첫 3달은 월 100만원 그 이후에 정규직 전환이 이루어진다는 말을 듣고, 두번 생각도 안하고 바로 출근하겠다고 했다. 아직도 날짜가 생각이 난다. 6월 10일? 졸업작품전이 끝나고 온 전화에 나는 그 다음 주 부터 출근을 하였다. 작은 고시원에서부터 생활을 시작했다. 


준비를 해야한다는 생각도 없던 부모님은 항상 나의 결정에 당황해했다. 그래서 그럴때마다 싸워야 했다. 그래서 우리의 사이는 그렇게 점점 멀어졌었나 보다. 


사실 한번 더 생각해보고 저질렀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적은급여로 서울 생활을 하는것은 쉽지 않았다. 부모님께 용돈까지 드린다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사실 나는 항상 마이너스였다. 월세 공과금 명품가방은 커녕 씀씀이도 크지 않은데 돈은 항상 모자랐고, 그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싸우고 올라왔는데 실패했다고 포기했다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3년이 되던해에 지쳐버린 나는 미국행을 결정했고, 이 또한 그냥 내가 하는 소리인줄 알았던 부모님은 갈려면가라~? 라고 그냥 지나쳐버렸는데, 결국은 티켓을 사버린 딸에게 당황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항상 부모님의 예상밖의 결정을 하곤했다. 그렇게 가버린 미국땅에서 많은일들이 있었다. 생각보다 나의 머리는 좋지 않다는걸 알아버렸고, 나의 체력의 한계는 그것보다 더 약하다는 것도 깨달아 버렸다. 



일론머스크처럼 100시간을 일 할 수 있는 체력은 아무나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 버렸으니까. 지치다 못해서 더이상 견딜 수 없던 때에 나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게 결정을 해버렸다. 



추진력 하나 만큼만은 자타가 인정하는 나는 내 사업도, 그리고 내 차도 살고 있던 아파트도 모든걸 다 뒤로 하고 와버렸다. 더 이상은 견디면 내가 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때만 찾는 하나님의 계시라는 소리를 하며 준비도 없이 이민가방 두개에 들어갈 수 있는 양만큼이라면 뭐든지 다 넣어버렸다. 



한동안 돌아와서 쉰다고는 했지만 불안했던것도 사실이다. 일년정도 지금에 와서야 기우였다는 것을 알지만 그때는 어찌나 혼자 불안하고 힘들었었던지, 


20대 누군가에게는 향수지만 나에게는 너무 큰 진통이었다. 나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깨달은 진통의 시기였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훈계의 시간이었다. 



저질러 버린 대학원 지원 호언 장담하며 큰소리 떵떵 치던 나는 한달 내내 두판에 7.99 하는 도미노 피자를 먹으며 버텼다. 


영어를 하지 못해 룸메이트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기도 했다. 창문에서 뜨거운 바람이 쏟아져 들어와 방은 한증막 같았고, 메니져가 빌려준 창문형 에어컨에서 그 사막기후라는 엘에이에서 이상하리 만치 습기찬 내방 에어컨에서 나오는 물이 매일 한 버스켓이였다. 



돈이 없어 생리대를 사지 못한 때도 많았다. 일하던 회사에서 남은 음식을 싸와 먹던 때도 많았다. 범퍼가 부서진 차를 돈이 없어 고치지 못하고 덜렁 거리며 조심조심 운전 하던 때도 있었고, 


동전을 모아간 주유소에서 겨우 25전 (300원)이 모잘라 돈을 못내 쩔쩔 매던 때가 있었다. 여러가지 갈등으로 고모집에서 쫒겨난 집에선 룸메이트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주말마다 하우스 파티에 내 화장실에 토해놓은 토사물들 정말이지 나는 싫었다. 그들과 맞는 삶이 아니었다. 



여러모로 돈이 없는 이방인은 언제나 구차할때가 많다. 영어도 못하는 내가 그나마 잡은 일자리는 다행히 그래픽 디자인이였지만 배달도하고, 창고 물건을 정리하기도 하고, 회사에서 적응을 못해 그나마 밝은 기운 뿜뿜하는 맥시칸 친구들과 안되는 영어로 소통하며 친구를 만들어 갔다. 


혼자 밥먹는 시간은 언제나 익숙한 일이었고, 명절마다 너무 외로웠으며, 매일 걷는 거리와 카페 식당이 언제나 어색하고 내 집같지 않았다. 사무치게 내 친구와 가족이 너무나 그리웠다. 



사촌이 있었으나 언어와 문화가 다른 우리에게 나는 언제나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천덕꾸러기였고, 그럴때마다 나의 자존심은 언제나 상처가났다. 



매일이 서럽고 너무나 외로웠다. 그런 시간을 지나고 겨우 내 사업을 시작했는데 코로나가 터지고 돌보지 못하고 일만 하던 나의 건강도 약해졌다. 



9년의 시간 포기 하는것도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절대 돌아가지 않을것이다. 한번 해봤으면 됐으니까. 가장 이뻤던 시간을 가장 힘든 시기로 보냈던 나지만 그 시간중에서 무언가는 많이 배웠을것이라고 믿는다. 그 많은 서러웠던 시간중에서도 내가 얻은것이 있을것이라고 믿는다. 



똑똑하지 않아도, 예쁘지 않아도되고, 성공하지 않아도 된다. 사실 이게 내가 배운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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