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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Tree May 26. 2022

해방 따위가 존재할까?

'나의 해방일지'는 상실 이후에도 계속되는 삶의 모습을 그리며 인생에 관한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가족과 집, 살아나간다는 것, 인생에서의 해방 그리고 '엄마'와 같은 다양한 화두를 끄집어낸다.


극 초반부터 엄마의 푸짐한 밥상 그리고 진심으로 밥을 먹는 장면이 유난히 많아서 '이 드라마는 왜 이렇게 밥 먹는 거에 집착할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도 그 엄마의 밥상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 밥상에 앉아 함께 밥을 먹고 싶었다. 


세월의 흔적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어수선한 거실, 기름과 양념으로 끈적거릴 것 같은 부엌이 지겨웠는데 엄마를 빼앗기고 난 후 모든 것이 낯설고 스산해져 버렸다.                                                                      


엄마는 낡고 늘어진 셔츠를 입고 날마다 밭으로 공장으로 그리고 빨래를 널고 마당과 거실에서 가지를 썰고 고구마 줄기를 깐다. 그래서 논두렁에 꼴아 박혀도 밥을 안쳐야 하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존재감 없이 그 자리에서 매일매일을 그렇게 사는 사람이고 아마도 영원히 그렇게 우리 곁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엄마의 푸짐한 밥상, 아침을 알리는 소리, 막내의 아침 출근길과 밤이 어두워오면 자식의 귀가를 걱정하는 소리가 사라진 이후에야 엄마가 이 모든 것의 구심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구심점이 사라진 가족은 흩어진다. 역시 삶은 예측할 수 없고 잔인하고 허깨비 같다. 


포획틀에 들어가 잡혔던 들개들처럼, 서울에 돌아간 구 씨의 인생도 다시 어딘가에 갇혀버렸다. 채워지지 않는 공허를 느끼던 그는 ‘집에 가고 싶습니다’라고 외친 삼식이 마음이 자기 마음인 것을 알고 산포로 발걸음 하지만 늘 그곳에 있을 것 같았던 가족은 흩어지고 어머니의 고구마 줄기 밥상도 더 이상 없다.  


엄마는 죽음으로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 해방 따위가 우리 삶에 존재하기는 한 건지....                      


우리는 어쩌면 마치 있지도 않은 형을 그리워하는 창희처럼 매일 내 옆에 있는 건 지겨워하면서 허상으로 나를 채우려고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데 창희는 그걸 알아버린 것 같다. 돈, 여자, 집, 차... 다들 그런 거에 깃발 꽂고 달리니까 덩달아 달린 것뿐. 이 길로 쭉 가면 행복하지도 않고 지치기만 할 것이라는 것을.  어디에도 굳이 깃발을 꽂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염미정의 이런 독백이 떠오른다.


"인간이 쓸쓸할 때가 제일 제정신 같아요"

"나 뭐예요? 나 여기 왜 있어요?"

"이불속에서도 불안하고 사람들 속에서도 불안하고"

"자기가 진짜 뭔지 모르면서 그냥 연기하며 사는 허수아비"

"이런 모든 질문을 잠재워 두기로 합의한 사람들"


자신을 제대로 보고, 온전히 받아들이고, 추앙하고 환대함으로써 해방을 맞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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