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는 너무 다른 우리 아빠.
우리 아버지는 확실히 다른 아버지와 다르다.
소위 말하는 평범한 아버지들과는 정말 확실히 다르다.
경제관념 정말 투철하신 아버지.
신앙이 그 무엇보다 우선인 아버지.
운동 참 못하시는 우리 아버지.
술 담배 안 하시는 아버지.
사교성이 별로 없는 우리 아버지.
독서, 묵상, 기도가 평소 생활의 전부인 우리 아버지.
완벽주의자 기질이 있어 보이는 아버지.
물어보면 정말 다 알 것 같던 아버지.
내 나이 거의 서른인데,
아직도 너무 크게 의지하고 있는 우리 아버지.
난 우리 아버지 그늘 밑에서 자랐다.
사막같이 메마르고, 직사광선이 내리 꽂히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는 그 무엇보다 거대한 천막이었다.
삭막한 환경에서 오롯이 희생하며 만들어내신 쉼터.
그 안에는 에어컨도 있었고, 물도 콸콸 나왔다.
아버지는 그늘 없는 쉼터 밖에서 무거운 공구들을 짊어지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끝없는 보수 작업을 하셨겠지.
에어컨 끄고 선풍기 쓰라는 아버지.
휴지 좀 아끼고 물 좀 아껴 쓰라는 아버지.
물과 휴지를 쓸 수 있고, 선풍기를 틀 수 있는 행복을 뒤로한 채
에어컨을 못 트는 것에 집중한 나는
무척이나 어렸고 타성에 젖어 있었다.
그게 당연한 게 아닌 줄 알면서도,
일상을 살아갈 때는 그것들이 아버지의 땀방울을 판 대가라는 걸 망각하기 쉬웠으니까.
난 항상 쉼터 안에 있었으니까.
#1. 아버지의 버릇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아버지는 우리와 같이 살 때 항상
잠자리를 자꾸 확인하셨다고 한다.
이불을 잘 덮고 자는지.
나는 특히나 잠버릇이 사나워서
올 때마다 이불을 다시 덮어주셨다고 한다.
나는 지금도 어깨가 드러나는 민소매를 입고 자거나
배를 드러내고 자면 정말 거의 십중팔구 몸이 으슬으슬하다.
다른 남자들처럼 팬티바람으로 자질 못하는 몸이다.
실제로 지금도 친형이 사준 화색 내복을 입고 잔다.
이 하와이에서 에어컨도 끄고 말이다.
내 생각엔 어릴 적부터 아버지께서
내 이부자리를 너무 잘 정리해주셔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만약 사실이라면 참 우스운 이야기.
사실이면 좋겠다.
좋든 나쁘든 아버지의 사랑의 흔적이
평생 나와 함께 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2. 치과비용 사건
나는 치아 골밀도가 낮은 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양치와 치실질을 매일매일 꾸준히 하진 않았다.
아버지는 정말이지 양치와 치실 질의 신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우리 아버지 같다면,
지구 상의 치과 개수는 과장 없이 백분의 일로 줄어들 것이다.
시카고에 있었을 때 얘기다.
치과에서 견적이 천문학적인 금액이 나왔다.
치과에서 집에 돌아왔는데,
머리끝까지 화가 나신 아버지께서 날 맞이할 준비를 하고 계셨다.
정문 바로 앞 소파에서 말이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아버지는 아마 미리 머릿속으로 준비하신 대로 빈 물병을 던지셨고
멍청한 내 반사신경은 그것을 피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나의 거금을 주고 산
기백 불 가량의 헬스 보조식품들, 간식 같은 음식들을 모두 버리시며
우리 가족에게 선포하셨다.
앞으로 끼니 외에 간식 먹지 말고 치아관리 철저히 하라며.
아버지는 그날 정말 제대로,
우리 가족 전부가 치아관리 제대로 하는 버릇을 들이겠다는 일념 하에 하신 행동이셨다.
물론 지금도 아버지처럼 치아관리를 하진 못하지만,
난 그날 당장 탄산기 있는 음료가 얼마나 몸에 나쁜지 검색하여 스스로 세뇌시켰고
실제로 지금껏 탄산음료는 제대로 멀리한다.
인슐린 관련되어 몸에 안 좋은 건 물론이요,
이에 닿으면 녹는다는 생각이 실제로 들어서 거부감이 느껴진다.
이건 아빠가 이겼다.
아 물론 맛은 좋아서 가끔 마시지만, 내 돈 주고 사진 않는다.
#3. 담배 사건과 침묵의 공포
나는 학창 시절에 담배를 피웠다.
오해하지 마라. 전교에서 노는 질 나쁜 양아치는 아니었고
특유의 말발과, 관심받기를 거부하지 않는 성격으로
뭔가 모두가 좋아하는,
학급 내에서만 설치고 다니는,
근데 의외로 축구는 못하고 공부와 음악 미술은 곧 잘하는
원숭이 같이 활발한 그런 학생이었다.
그날따라 중2병이 늦게 찾아온 것일까.
머리가 헤까닥 했나 보다.
어린 인생에 힘든 일이 있어서 청승이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아주 늦은 밤,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한 후
어른 흉내를 내며 담배를 한대 피우고 왔다.
학창 시절 단독으로 늦은 밤에 그런 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들어왔을 때는 아버지가 책상을 펴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아버지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살면서 느꼈던 가장 큰 공포가 기억난다.
아버지는 끝없는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난 그럴수록 온 몸에 식은땀이 나고
고개를 들기가 무엇보다 두려웠으며
실제로 몸이 덜덜 떨리고 담이 걸릴 지경이었다.
폭력이 없으신 아버지지만,
그날은 내가 살면서 아버지가 가장 무서웠던 날이었다.
그날 아버지는 무섭다는 트라우마가 생겼던 것 같다.
무엇이 그렇게 무서웠을까?
나도 사실 잘 모른다.
아들에게 있어서 아버지라는 존재 자체가 주는 공포감과 중압감은
정말이지 엄청나다.
#4. 아버지의 알통
아주 단적인 기억이다.
엄청 어렸을 때.
앞뒤 기억도 없다.
“아빠 알통 보여줘!” 하면
이두박근을 보여주곤 했었던 기억.
그때는 정말 그 근육이 너무 크고 웅장했다.
이때의 기억은 우리 아버지는 엄청 세다!
하는 긍정적인 기억을 심어 준 가장 큰 기억인 것 같다.
참 귀여운 기억이다.
나도 아버지가 된다면 자식들에게 알통을 보여줘야겠다.
#5. 아버지의 예민함
나는 잘 때 누가 업어가도 모른다.
실제로 최대 음량의 알람이, 배터리가 다 닳도록 울려도 깨지 않은 전과가 있다.
아버지는 정 반대이다.
주무실 때 문이 벌컥 열리면
벌떡 일어나서 반응하신 적이 몇 번 있다.
발칙한 소리지만 이게 굉장히 웃기다.
마치 두더지 게임의 두더지가 튀어나오는 것 같다.
시력이 안 좋아서 벌떡 일어나셔도 뭐 별거 안보이시면서 쳐다보신다.
아마 한참 주무시고 계실 때 박수한번 짝 치면 일어나실 것이다.
이렇게도 예민하신데 엄마 옆에서는 어떻게 자는지 모르겠다.
#6. 아버지와 안경
아버지는 지독한 근시이다.
안경이 없으면 장님이다.
어릴 때부터 안경을 벗으면 무서워 보였다.
엄마한테 아빠는 안경 벗으면 깡패 같다고 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아직도 유효하다.
#7. 여보 내 거는?
대학생이었나, 고등학생이었나?
아르바이트비를 좀 모은 기념으로
부모님에게 선물을 사드리고 싶었다.
아버지는 무엇을 사 드릴까 고민을 해도,
검소하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받아야 좋아하실지 답이 나오질 않았다.
결국 어머니 코트만 하나 사서 선물해 드린 기억.
어머니께서 왜 아빠껀 안 샀냐고 했었었나?
뭔가 기억으로는 아버지께서
“여보 내 거는?” 하고 물었던걸 엿들은 기억이 난다.
절대 그런 말씀을 하실 분이 아니어서 마음이 덜컹했다.
돈이 아까워서 안산 게 아닌데,
사드리고 싶은 마음이 더 컸으면 컸지, 없는 게 아닌데,
억울함과 죄송했던 내 마음이 너무너무 생생하다.
무언가를 못 받아서 서운하신 게 아니고,
어머니만 챙겨드린 게 마음을 더욱 헛헛하게 만들었을 생각에
지금도 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기억이다.
#8. 계곡에 가면
우리 가족은 휴가를 가면 항상 계곡으로 갔었다.
바다도 아니요, 산도 아니요, 꼭 계곡으로 갔었다.
나도 계곡이 너무 좋았다.
계곡에서 해 먹는 닭요리도 맛있고,
손가락만 한 물고기 잡는 것도 너무 재밌다.
지금도 그렇게 놀 자신이 있다.
아버지는 우리와 어울려서 신나게 같이 노셨었다.
내가 어머니에게 아빠 계곡 되게 좋아하시는 것 같다며
천진난만하게 말했었다.
어머니는 아빠가 평소에 고생하고 힘들고, 또 놀 줄 몰라서 그렇다며
우리가 아빠한테 정말 잘해 주어야 한다고 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눈을 돌려 보았던 아버지의 모습은 서글펐다.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인 것 같은데 분명 슬펐다.
그때 엄마의 눈과 목소리는 정말 슬펐다.
#9. 미국에서의 서류 작업들
미국에서 살아가면서 느낀 것은,
참으로 아날로그적이면서도 확연한 법치국가이다.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서류 작업들이 너무도 많다.
특히나 외국인 신분으로써는 더욱 그러하다.
덩치 큰 뻐꾸기가 자그마한 새에게서 먹이를 받아먹듯,
난 머리가 굵었어도 아버지에게만 의지해 왔다.
아버지는 워낙 세세한 포인트도 놓치지 않으시는 분이셨고
또 물어보면 다 아셨으니까.
나중에 내가 홀로 해야 되는 서류 작업 관련된 일들은
뭔가 익숙지 않았고 미루기 일쑤였다.
이럴 때마다 아버지를 찾게 되지만,
군대 내에서 해야 하는 서류 작업은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있을 땐 모르지만 사람 난 자리는 확실하다는 말.
헛소리는 아니다.
내가 엄청난 부자라면, 아버지 같은 사람을 매니저나 비서로 고용하고 싶다.
#10. 아버지 학교
만약 아버지라는 역할에 굳이 할당량이 있다고 치면,
우리 아버지는 할당량을 훨씬 웃도는 헌신과 사랑을 주셨다.
그럼에도 더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으셨나 보다.
우리에게 아무리 화가 나도,
표현을 아끼시고 수시간 허리에 손을 올린 채로 화를 삭이시던 아버지.
아무리 못마땅해도 인격체로써 존중하려 하셨던 아버지.
살면서 학업으로 잔소리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으신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아버지 학교라는 프로그램을 수강하시고
우리 가족 전체를 데리고 어디론가 향했다.
프로그램에서 배운, 가족과 뭔가를 하는 이벤트가 있었던 것 같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부드러웠다.
고지식하게 뭔가 배우신 그대로 우리에게 하시는 듯한 아버지.
사실 그때의 내용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버지의 노력이 너무 감사하단 것과,
그때 간질간질했던 사랑스러운 가족 분위기.
마냥 행복한 냄새가 났던 그날의 기억.
아버지는 겸손한 객관화를 잘하신다.
말씀을 아주 논리적으로 잘하시면서도,
자신은 말하는걸 너무 못했어서 고생했다고 하셨다.
또 너무나 조용하신 분이지만,
자신이 속에 화가 많다고 하시며 멋쩍어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검소하시고 본인을 위해 쓰는 법이 없으시지만,
자신은 돈에 대한 자유로움이 없다며, 안 좋은 거라고 하셨다.
이건 지금도 납득이 잘 가지 않는다.
남들이 엄두도 못 낼 장점들이 많으시지만,
본인의 부족함을 인지하시고 겸손하신 우리 아버지.
그 수많은 헌신과 희생을 전혀 생색내시지 않으시는 분.
하지만 예민하고 주도면밀하고 진중한 성격 탓에
혼자 사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시고,
매사에 그러려니 하는 태도는 잘 찾아볼 수 없는 고리타분한 사람.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아버지이다.
어머니도 잘 아시고, 아버지도 아신다.
지금도 그 마음은 정말 한치의 변함도 없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민망해하시며 말씀하신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한 사람이 아니란다.”
이제는 아들들이 나이를 먹어서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뜬금없는 끝맺음이지만,
아버지 주도하에 항상 함께하던 가족 성경 나눔 시간들이 그립다.
당시에는 아무 생각 없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