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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청년 Mar 22. 2020

독재자는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스티븐 그린블랫 - 폭군

내게 있어 독재자 하면 기억나는 인상은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을 때 할머니가 슬피 울던 기억과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나왔던 ‘엄석대’다. 또 생각나는 건 친척들이 명절 때 모여서 광주항쟁 얘기를 할 때면 커튼 닫고 문 닫고 조용조용 얘기하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독재자 하면 북한 김정은이나 먼 옛날 얘기로 치부될 수도 있겠지만 조금이나마 그런 기억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는 건 상상하기도 싫다.


이 책은 부제에서 알려주듯이 셰익스피어 비극에 나오는 독재자들과 그 주변 인물들을 통해 그들이 어떻게 권력을 잡게 되었고, 독재자의 특성은 어떻고, 독재자들을 돕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한다.


셰익스피어는 너무 유명해서 4대 비극 중 햄릿, 리어왕, 맥베스를 어릴 때 읽은 거 같은데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명대사 빼곤 잘 기억은 안 난다. 원래 고전은 ‘누구나 알지만 읽지 않는 책’이라고 작가 김영하가 그랬지만 고전은 그만한 이유가 다 있다. 이 책을 보면 셰익스피어 책을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셰익스피어는 문제를 직접적으로 얘기하는 것보다 간접적으로 돌려서 말하는 것이 그 문제를 더 분명하게 제시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때 분위기상 살아남으려고 그랬을 수도 있지만 그는 희곡에서 역사적인 사건으로 그때의 영국 왕실과 귀족들을 돌려서 비판했다. 그들은 역사적인 인물들의 어리석음을 보고 비웃었지만 그 속엔  그들의 모습이 있었던 거다.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은 현실 속의 계급갈등을 유머 있게 돌려서 말하니 자본주의의 상징인 아카데미 수상까지 했다. 현대판 셰익스피어 아닌가 싶다.


1.

독재자들이 권력을 잡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군중심리와도 관련이 깊다.


“군중이 원하는 것은 그런 책임 있는 자세가 아니라, 신의를 무시하고, 약속을 위반하며, 원칙을 훼손하는 행위를 그냥 내버려 두라는 것이다.”


“민중 선동가의 언변이 어리석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지만, 그런 말이 이끌어 내는 웃음은 그 위협을 단 한순간이라도 줄여주지 않는다.”


군중이 원하는 건 신의나 책임이 아니고 그런 걸 깨버릴 수 있는 권력에 대한 숨겨져 있는 바램이 투영된 것일 수도 있다. 정치가의 말이 황당하다는 걸 알지만 거기서 주는 웃음을 좋아하기도 한다. 허경영 같은 예를 봐도 알 수 있다. 우리는 선비 같이 고상하거나 유비같이 우유부단해 보이는 정치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2.

독재자를 돕는 사람들은 그를 이용해서 자신의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들이거나 모른 체하는 사람들이다.


독재자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은 그를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오산이다. 얼마 전에 본 ‘남산의 부장들'이란 영화에서 박정희는 자신이 원하는 걸 지시할 때마다 “임자 옆에는 내가 있잖아. 임자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말한다. 대통령이 원하는 대로 하지만 결국 내가 한 일이 되어 팽 당한다.


또 한 부류는 “나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따지지 않겠어. 그러면 나는 그 의미로부터 책임이 없게 될 테니까”라고 말하며 모른 체하는 사람들이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말한 ‘악의 평범성’과도 관련 있다. 무슨 일이든 그 의미를 따지지 않고, 그냥 지금 일에 충실하자는 태도는 자기가 엄청난 죄를 저지르고 있어도 깨닫지 못한다.


3.

권력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존재한다. 


독재자는 나라에만 있는 게 아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있을 수 있고,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도 있을 수 있고, 친구 간에도 있을 수 있다. 어느 순간 내 얘기는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며 항상 양보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건 이미 동등한 관계가 아니라 권력관계인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권력을 가지려는 본능 같은 것이 있는지도 모른다. 남의 말을 들어주지는 않으면서 내 말만 들어주기를 바란다면 그는 이미 독재자다. 그런 사람을 모른 체하고 다 들어주는 나는 그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이다.


독재자는 멀리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독재자고 남을 독재자로 만들 수도 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관계가 말 잘 듣는 사람인지, 동등한 한 사람인지 곱씹어 생각해 봐야 한다.


독재자는 멀리 있는 게 아니다.




p13

소문의 효과는 잘못 해석된 신호, 사기성 위안, 거짓된 경보, 황당한 희망에서 자살적 절망으로의 갑작스러운 이동 등에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소문에 가장 잘 속는 인물들은 무식한 군중이 아니라 특혜와 권력을 누리는 자들이다.


p87

셰익스피어는 이런 보상 심리 - 성적 즐거움 대신에 정치권력 - 가 독재자의 심리를 모두 설명해준다고 암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독재 권력에 대한 야망과 온전하지 못한 성적 생활 사이에 중요한 함수 관계가 있다는 확신을 드라마 내내 유지한다.


p123

그의 입지를 강화하려면 뭔가 추가 조치를 해야 했고, 범죄 행위를 통하여 목표를 달성했으므로 추가로 범죄 행위를 해야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다. 독재자는 최측근의 충성심에 강박적일 정도로 몰두하지만, 과연 그런 충성심을 확보했는지 절대 자신하지 못한다. 그에게 봉사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리처드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기적인 악인들뿐이다. 아무튼 그는 정직한 충성심 혹은 냉정하고 독립적인 판단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대신에 아첨, 확증, 복종을 원했다.


p146

독재는 그 자신의 권력을 영구화하기 위해 현재의 세대뿐만 아니라 미래의 세대도 죽이려 든다. 맥베스가 리처드와 마찬가지로 어린아이들을 죽이려 하는 것은 음모의 다급함 때문만은 아니다. 독재자는 미래를 적으로 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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