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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청년 May 17. 2020

정말 미안하지만 안 되는 건 안된다.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비밀의 숲'

난 고등학교 때 정말 많이 맞았다. 일 학년 때 본의 아니게 반장이 됐는데 아침에 등교하면 학생회실 가서 머리 박고 맞으면서 시작했다. 교련 시간에는 방독면 쓰면서 맞고, 체육 시간에는 애들 조용히 안 시켰다고 체육부장과 하키 채로 맞은 기억이 난다. 선생님들은 수업시간에 문제 틀리면 때리고 성적이 떨어져도 때렸다.


반에서 20등까지만 학교 도서관을 배정해 주었는데 1등부터 순서대로 앉았다. 성적이 바뀌면 자리가 바뀌었다. 교무실 들어가면 자욱한 담배연기와 한쪽 벽면에 세워진 몽둥이들이 생각난다. 거짓말 같겠지만 영화 ‘화산고’ 생각하면 된다.




하루키가 학교와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나와 너무나 흡사해서 놀랐다. 폭력이 일상이었고 선생님에 대한 좋은 기억이 별로 없다. 폭력과 권위로 질서를 유지하는 사회는 사람을 비굴하게 만든다.


이 책은 하루키가 ‘주간 아사히’지에 연재했던 칼럼을 모아 만든 에세이집이다. 그의 소설도 좋지만 에세이집은 깐깐하면서도 균형 잡힌 시각과 통찰이 약간은 유머스럽게 일상의 소소한 일들과 함께 펼쳐져서 더 좋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비밀의 숲' 에피소드는 친한 화가인 미즈마루 씨와 클럽에 갔다가 한 아가씨가 춤추자고 해서 엉겁결에 응했다가 퍼진 나쁜 소문에 관한 이야기다. 하루키는 이런 이야기도 솔직하고 담담히 얘기하는데 소문의 근원지인 미즈마루 씨에게 투덜대는 게 귀엽다.


‘매죽 클래스 러너스 클럽'은 후배와 둘이 시작한 마라톤 동호회 이름이다. 실력이 비슷한데 매번 간발의 차이로 이기다 보니 후배가 일부러 져주는 건 아닌지 의심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럴 이유는 없다. 나도 탁구를 치다 보면 항상 간발의 차이로 이기는 친구가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많다. 징크스이기도 하고 천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이유가 있다기보다 집중력과 멘털의 상대적인 차이가 아닐까 생각한다.


남들이 힘들어하는 장거리를 좋아하고 오르막길을 좋아하는 자신을 이상한 성격이라고 말한다. 농구를 하다 보면 죽을 것처럼 힘든 순간이 올 때가 있다. 그러면 그 순간이 슬로비디오처럼 느껴진다. 체력이 한계에 다다르면 정신이 더 집중한다. 그 맛을 느껴본 사람은 안다. 이상한 성격이 아니라 그 맛을 아는 거다.


문학전집을 기획한 한 편집자가 하루키의 허락도 받지 않고 미리 홍보를 했다가 거절을 당하자, 주변 지인을 동원해 압력을 가하다가 포기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훗날 그 편집자가 투신자살을 했다고 한다. 하루키는 그 사람의 죽음에 자신도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거 같아 정말 죄송하지만 비슷한 사태가 다시 일어나도 같은 행동을 할 거라고 말한다.


글을 쓴다는 것, 무에서 뭔가를 창조한다는 것은 어차피 치고받는 난투극의 세계와도 같다. 모든 사람들에게 싱글벙글 웃는 얼굴을 할 수도 없고, 본의 아니게 피를 흘려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 책임은 내가 양어깨에 지고 살아가는 수밖에


‘미안해서, 거절하기 힘들어서’ 주변에서도 나도 이런 단어들을 너무 많이 썼다. 해주고도 찝찝하고 개운치 않다. ‘정 없어 보일까 봐, 이기적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친구를 잃을까 봐’ 두려워서 들어주어도 마음에 상처만 받는 경우가 많다. 정말 미안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지는 거다. 다 들어줄 수는 없다.


형태가 있는 것은 언젠가는 사라진다. 형태가 없는 것 역시 언젠가는 사라진다. 남는 것은 기억뿐이다


기억도 분명치 않다.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왜곡된다. 물체도 사라지고 정신도 사라지지만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던 것들이 패턴이 되어 누군가에게 영향을 줬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런 것만 남을 수도 있다.


하루키의 삶에 대한 태도가 좋다. 매일 글을 쓰고 달린다. 모든 폭력을 싫어하고 무뚝뚝하고 고집스러워 보이지만 글에는 위트가 있고 밉지 않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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