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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청년 May 23. 2020

함께 산다는 것이 곧 의존을 의미하면 안 된다

콘크리트 - 하승민 장편소설

황금가지 출판사의 서평 이벤트에 응모하여 받게 된 소설이다.


'안덕시'라는 가공의 몰락한 산업단지가 있고 바닷가에 있는 도농복합도시가 배경이다. 외국인 노동자가 많고, 바닷가 근처고, 읽으면서 안산시를 생각했다.

 

검사 출신의 여변호사가 아들을 데리고 고향에 내려오면서 겪게 되는 연쇄 살인사건이 중심이다.


안덕시에는 해결사 역할을 자처하는 범죄 예방 위원회 회장 장정호가 있고 그의 심복들인 길림 마트 사장 윤정두, 횟집 사장 김영남,  골프연습장 사장 안동철, 인력사무소 사장 철진이 장악하고 있다. 그리고 그 뒤를 봐주는 2선의 국회위원  박해남과 돈세탁에 동원되는 조폭들이 있다.


어느 날 길림 마트에 불이나고 사장 윤정두는 실종되고 지문등록이 되어 있지 않은 손가락만 발견된다.


변호사 세휘가 검사를 떼려 치고 고향에 내려온 이유는 남편과 이혼 및 양육권 때문에 소송 중이기 때문이다. 엄마 소개로 당숙을 만나게 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장정호다. 은밀히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아달라고 부탁하고 정치계로 들어갈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거래를 제안한다.


세휘는 수민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몽롱함이 좋았다. 애매한 것들, 불투명한 것들이 좋았다. 확실한 것을 모호하게 만들기 위해 술을 마셨다. 정의와 부패의 중간에서 술을 마셨다. 축하와 비난의 사이에서, 포만과 허기 사이에서 술을 마셨다. 그러다 보면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좋은 날은 축하해야 했고 힘든 날은 견뎌야 했다. 어느 쪽이건 술이 필요했다. 말하자면 하나의 의식이었다. 역치가 너무 높아진 의식.


이때 당숙이 세휘를 꼼짝 못 하게 옭아매는 방법이 인상적이다. 먼저 약점을 잡고 당근을 준다. 엄마가 알츠하이머성 치매고 세휘가 알코올 중독인 걸 알고 있다. 남편과 소송 중인데 알코올 중독이면 이기기 어렵다. 그리고 엄마 치료비에 쓰라며 돈을 주고 정치권에 줄을 대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면 양육권 소송에도 유리할 것이다.


옳은 일이라는 건 없었다. 해야 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을 뿐이었다. 그사이에 갈등이 존재했고, 그게 인숙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인숙을 지탱하는 건 신념이었다. 괴물로 한 평생을 살아온 인숙에게도 신념이라는 게 있었다.


사건을 팔수록 당숙의 악행이 드러난다.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인 인숙은 거대한 몸집으로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고 동네 고양이나 개를 잡고 다닌다. 그 딸인 도연은 엄마와는 너무 다르고 외국인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쳐 주는 봉사활동을 한다. 낯선 외국인에게 한국말을 가르쳐주는 중학생 도연이 외국인에게는 천사 같을 것이다.


세휘는 아이의 순수함이라는 건 없다고 믿었다. 순수라는 건 무지의 동의어였다.


아들 수민은 두세 살 많은 도연과 친하게 지내고 방에서 단둘이 있다가 세휘에게 들키기도 한다. 사춘기가 시작될 때쯤 수민은 서울에서 갑자기 내려와 적응하기 힘든데 친근하게 다가온 성숙한 도연에게 푹 빠졌다.


이렇게 어려울 때 손 내밀어준 사람에게 사람들은 의존하게 된다. 의존이라는 것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의존함으로 말미암아 종속되는 문제점도 가지고 있다. 종교도 비슷하다. 마음의 위안이 되기도 하지만 종속되어 삶을 가둘 수도 있다.


한때 번영했던 왕국은 이제 불에 그을리거나 폭삭 내려앉아 재기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인숙은 그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고막을 찢을 듯 날카로운 비명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생명이 꺼지는 소리였다. 콘크리트가 무너지고, 땅이 갈라졌다.


책 제목이 콘크리트인 이유는 아마도 안덕시가 굳건한 토착세력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었던 걸 의미하는 거 같다. 그곳에 연쇄 살인사건이 발생하면서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금세 보수될 수 있는 것도 콘크리트다. 수명이 아주 오래되지는 않지만 보수가 쉽다. 안덕시의 모든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 같았던 장정호가 죽지만 다른 누군가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한번 어떤 것에 의존했던 사람은 그것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다른 걸로 대상을 바꿀 뿐이다. 찰스 두히그의 [습관의 힘]에 보면 ‘습관은 없애는 것이 아니라 바꾸는 것’이라 했다.


함께 산다는 것이 곧 의존을 의미하면 안 된다. 부부 사이도 가족 사이도 의존으로 지탱된다면 평등한 관계가 아니라 종속적인 관계일 뿐이다. 함께 산다는 것은 적정한 거리에서 균형을 이루면서 서로 공전하며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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