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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청년 May 30. 2020

죽음 때문에 삶이 있는 거다

신경숙 장편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2018년 1월에 아버지가 뇌종양으로 돌아가셨다. 2015년 4월에 뇌경색으로 쓰러지신지 3년 정도 지난 후 였다. 처음 6개월 정도 입원 생활을 했고, 그 후엔 집에서 통원 치료를 하시다가, 돌아가시기 3개월 정도 다시 입원 생활을 했다. 낮에는 엄마가 간병하시고 나와 여동생, 와이프가 야간과 주말에 3교대를 했다.


처음 6개월간의 간병생활이 끝나고 나니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가를 새삼 깊이 느꼈다.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2015년 11월 경에 독서모임에 가입해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마음이 많이 공허했나 보다.




이 소설에는 여러 죽음이 나온다. 죽음으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난다. 죽음은 사람들 가슴에 상처를 남긴다. 상처는 상처를 알아보고 그 상처가 사람을 끈다. 죽음이라는 것을 통해 사람이 얼마나 성장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인생의 한 ‘마디’인 것은 분명하다.


어느날 주인공 정윤은 옛 남자 친구 명서에게 팔 년 만에 윤교수님이 병원에 입원하셨고 위독하시다는 전화를 받는다. 그렇게 윤교수의 죽음은, 멀어져가던 기억속에서 방황하던 젊은 시절을 소환한다.


정윤은 갓 입학한 대학에서 한학기도 마치기 전에 엄마가 세상을 떠나서 휴학을 한다. 복학해서는 사촌 언니집에 4년간 얹혀살았다. 학교에서 아웃사이더로 지내던 정윤은 윤교수 강의 시간에 명서와 청강하러온 미루를 만나게 된다. 손에 입은 화상자국과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분위기, 상처입은 사람은 같은 종류의 사람을 본능적으로 알아본다.


미루, 명서와 친해지게 된 정윤은 미루 자취방에서 언니 얘기를 듣는다. 학생운동 하던 언니 남친이 실종되고, 그로인해 언니가 분신자살 했고, 미루는 그걸 막으려다 화상을 입게 된 거 였다. 그리고 아직도 실종된 언니 남친을 찾고 있다.


가족의 죽음을 맞이 하게 되었을 때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어쩔 수 없으니 놓아주는 사람과 인정하지 않고 붙들고 있는 사람이 있다.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이, 그것도 사고로 죽는다면 쉽게 놓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마음의 빚을 평생 안고 산다. 괜히 내가 잘 못해줘서 죽은 거 같아 미안한 거다.


정윤의 어릴적 친구 단이는 특전사에 들어가기전, 미루 명서 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정윤은 단이 면회가서 밤을 함께 지내지만 단이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 단이는 얼마 후 총기사고로 죽는다. 정윤은 단이가 자신 때문에 죽은 거 같아 단이의 죽음을 한동안 인정하지 않는다.


미루와 정윤은 빈집에서 같이 살려 했지만 부모님 반대로 무산되고 미루는 사라진다. 나중에야 미루 엄마에게 미루가 외할머니가 살던집에서 거식증 때문에 죽었다는 걸 듣는다.


미루와 정윤은 가족의 죽음으로 인해 상처를 가슴에 품고 있다가 우연히 만나 서로에게 끌리지만, 결과적으로 한 사람은 그 죽음을 인정하고 놓아주게 되면서 살게되고, 한 사람은 그 죽음을 붙들고 놓지 않아 자신도 죽게된다.


아이러니 하지만 죽음 때문에 삶이 있는 거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죽음이란 걸 잊으려고 한다. 그래서 ‘메멘토 모리' 항상 죽는 존재임을 잊지 않아야 하고, 또 ‘카르페 디엠' 현재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제 5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 주변에 부모님들이 돌아가시고, 선배나 후배들이 암에 걸리거나 죽기도 한다. 나도 몸이 예전 같지 않고 아픈 곳이 늘어간다. 약 먹어도 잘 낫지도 않고 오래간다. 주변에 갱년기라 힘들다고 투덜대기도 하고 코로나 때문에 사람들 만나기도 힘들어 지면서 진짜 우울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아마 이제 언제 죽음이 찾아와도 특별한 나이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일 수도 있다. 당장 죽어도 아무 미련이 없다는 건 그만큼 후회없는 삶을 살았다는 증거일 거다. 난 아직 많이 아쉽다. 아직 너무 부족하다. 물론 때가 되면 삶을 놓아주어야 하겠지만 살아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해 노력해서 발전하고 성장하고 깨달음에 가까워졌으면 좋겠다. 물론 죽는 순간 아무 부질없다 할지라도.


벨 훅스가 ‘All about Love’에서 인간에게 있어 ‘완전’이란 단어는 도달할 수 없는 경지가 아니고, 늘 새로워지려는 의지를 내포하고 있다고 한 것처럼,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이 그냥 빈말이 아니라는 걸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또한 양적인 변화가 질적인 변화를 불러오는 거라고 믿는다.


‘사람에게는 미래란 없다. 사람에게 있는 것은 희망 뿐이다’라고 누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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