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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청년 Jul 08. 2020

이 세상은 공리주의 기반 사회였다.

공리주의 - 존 스튜어트 밀

공리주의 하면 떠오르는 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벤담의 원리다. 아마 고등학교 때 배웠던 것 같은데 무작정 외우기만 했지 이 명제가 도출되기까지의 논리를 배우지 못했다.


벤담은 ‘파놉티콘'이라는 일종의 감옥 양식으로도 유명하다. ‘파놉티콘'은 소수의 감시자들이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다수의 수용자를 감시할 수 있게, 원형 감옥 가운데에 감시탑이 있는 구조로, 항상 감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해서 통제하는 방법이다.


벤담은 행복을 수학처럼 계량화 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밀은 행복에도 질적 차이가 있다는 걸 인정한 점이 다르다. 벤담은 공리주의를 수학적 이론처럼 정립한 사람이고, 밀은 이 이론을 확장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밀의 성향은 그의 삶 속에서도 드러나는데 애가 여럿인 유부녀와 플라토닉 한 사랑에 빠져, 가족과 등지면서도 그 사랑을 버리지 않았고, 그 남편이 죽은 뒤에야 그녀와 결혼을 했다.


공리의 한자 뜻을 보면 功(공공), 利(이로울 리)로 공익이라는 뜻이고, 영어로는 utility(효용, 유용)이다. 영어보다 확실히 한자가 더 뜻이 다가온다.


책은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짧은 편이지만 읽기가 쉽지는 않다. 그래도 현대 철학서, 예를 들면 아도르노의 ‘미니멀 모랄리아'나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같은 책과 비교하면 어렵지 않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지금 이 세상은 놀랍도록 공리주의에 기반한 사회라는 것이다.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했더라도 우리는 공리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었던 거다.


공리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이자 기준이 되는 것이 ‘행복'이다. 주위 사람 누구에게나 ‘왜 사냐고’ 물으면 아마 열에 여덟은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답할 것이다. 행복 이외에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독서모임에 들어오고 책을 좀 보기 시작하면서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말하고 다녔던 게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으므로 더 이상 연연하지 않겠다였다. 그렇게 말했던 이유는 '행복은 욕심의 크기를 줄이면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삶의 목적으로까지 할 필요는 없다’라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쑥스럽게도 행복과 만족을 혼동했던 거다.


공리주의에서 말하는 행복은 어떤 의도된 쾌락이며, 고통이 없는 상태다. 반면에 불행은 쾌락 없음과 고통을 의미한다. 공리주의의 뿌리는 고대 그리스의 쾌락주의라고 불렸던 에피쿠로스 학파로부터 시작하는데 당연하게도 여기서 말하는 쾌락은 육체적 쾌락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정신적 쾌락에 더 가치를 둔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은 돼지의 쾌락이 아니다.’


공리주의는 행복과 만족을 혼동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데 ‘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한 사람이 낫고, 만족하는 바보보다는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낫다.’고 주장한다. 돼지나 바보가 만족한다고 해서 행복한 게 아니라는 거다.


만약 행복을 고도로 유쾌한 흥분의 지속적인 상태로 정의한다면 그런 행복은 분명 불가능하다. 하지만 사람들의 삶이 평온하다면 아주 적은 쾌락으로도 만족을 느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행복은 흥분상태가 아니고, 평온한 상태에 가깝다고 본다.


밀은 '지금까지의 도덕은 상대적인 기준밖에 없어서  하나의 행동지침이 되지 못하고, 인간의 실제 감정을 우선시하는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비판한다. 칸트는 이런 보편적인 법칙을 '정언명령'이라 불렀는데 그 역시 비판한다. 예를 들면 정언명령에는 ‘거짓말을 하지 마라' 같은 것들이 있는데 이것은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거짓말을 자주 한다.


공리주의는 이처럼 '개인의 행복이 쌓여서 사회 전체의 행복을 이룬다'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인간 행위의 목적이 되는 행복이 도덕의 기준이 되어야 하고, 행복은 인간 행위의 규칙이요 원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라고 한다.


공리주의는 좀처럼 반박하기가 어렵다. 도덕의 기준을 행복 말고 다른 어떤 걸 생각할 수 있을까? 인간 행위의 대부분이 육체적 또는 정신적 쾌락을 위한 것이고,  이런 쾌락이 곧 행복이며, 개인의 행복을 사회 전체의 행복으로 확장시켰고, 전체의 행복에 더 가치를 둔다. 또 '개인의 희생이 사회 전체의 행복에 기여하지 못한다면 의미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지금 사회가 공리주의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사회가 아닐까' 생각했다. 물론 '지금 사회는 공익을 우선시하기보다 개인을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라고 생각되지만, 어디까지나 공익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다. [개인주의자 선언]에서 문유석 판사는 '합리적 개인주의자는 자신의 자유를 위해 타인과의 협력과 연대가 중요하다'라고 했는데 그 입장이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공리주의는 내가 이제까지 접해온 철학 중에는 가장 합리적인 거 같다. 행복이 인간 삶의 목적이라는 것에 대해선 아직도 의구심이 좀 있지만 개인의 행복을 넘어서 사회 전체의 행복으로 확장시킨다면 나름 의미가 있겠다. 스토아학파는 그래서 행복 말고 미덕을 주장했다고 하는데 그건 더 아쉽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은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먼저 행복하자. 그다음에 하나씩 확장해 나가는 게 옳다.


- 이 책은 현대지성 서평이벤트로 받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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