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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청년 Jul 12. 2020

남의 불행에 느끼는 은밀한 기쁨 샤덴프로이데

위로해주려는데 왜 자꾸 웃음이 나올까 - 티파니 와트 스미스

샤덴프로이데는 독일어로 ‘샤덴'은 피해나 손상을, ‘프로이데'는 기쁨이나 즐거움을 의미한다. 즉 ‘피해를 즐긴다'라는 뜻이다.


잘난 체하던 친구나 직장상사가 불행한 일을 겪게 되면 ‘쌤통'이라며 고소해하는 감정 상태라고 생각하면 된다. 저자는 영어에 마땅한 말이 없어 독일어를 차용했다고 한다.


작가는 이런 감정을 8가지 상황에 빗대어 설명하는데 크게 개인적인 상황과 집단적인 상황으로 나눌 수 있다. 결론적으로는 이런 감정이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며, 인간 본성적인 것이고, 어쩌면 ‘작은 혁명'의 발단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거 같은데 작가의 주장에 크게 공감되지는 않았다.


사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일상적으로 이런 감정을 느낀다. 놀랍게도 가장 가까운 부모 사이와 형제간, 그리고 직장 동료 사이에서도 그렇다.


철학자 존 포트먼은 엄한 카톨릭 가정의 어머니 밑에서 이런 감정을 느꼈다고 한다.

“어머니는 제가 어떤 일에 실패하거나 망신당하는 순간을 즐기는 것 같았어요. 신이 내게 가르침이나 깨달음을 주는 거라고 생각하신 거죠.”

“네, 그래서 저는 나의 실패가 남의 행복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어린 나이에 깨달았습니다.”


형제간에도 라이벌 감정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형제 중 누군가가 특출 나면 그로 인해 정신적인 트라우마를 겪는 경우를 종종 보곤 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은 샤덴프로이데와 동전의 앞뒷면 같은 관계다. 가족 간에도 잘 되는 꼴을 보면 시기심이 든다. 그것은 생존경쟁이라는 인간 본성에서 나온 것일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부모에게 인정을 받느냐 마느냐에 따라 생존이 결정되었는지도 모른다.”


직장동료도 비슷한데 친구이기도 하지만 경쟁자이기도 해서 협력하다가도 실수나 불행한 일이 생기면 말은 안 하지만 고소해하는 거북한 상황이 온다.


남의 불행에 기뻐하는 감정이나, 남의 행운을 시기하는 감정의 밑바탕에는 주위의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여 자기가 낫다고 생각되면 우월감이, 자기가 못하다고 생각하면 열등감이 생기기 때문이라고 본다.


“미국 북부에 주둔한 흑인 병사들보다 남부의 흑인 병사들이 자신들의 삶에 더 만족하고 행복해했다.

남부에 주둔한 흑인 병사들은 아주 힘들게 살고 있던 현지 흑인들과 비교했을 때 자신들이 비교적 운이 좋다고 느꼈다. 북부에 주둔한 흑인 병사들은 그들보다 더 큰 자유를 누리는 현지 흑인들에 비해 자신이 더 불행하다 느꼈다. 스토퍼는 이 현상을 ‘상대적 박탈 이론'이라 부르며, 실제적인 박탈보다 상대적인 박탈이 더 고통스럽다는 결론을 내렸다.


스포츠나 정치, 종교 또는 민족 간에는 이런 감정이 집단적으로 존재하며 훨씬 강력하다. 상대편의 불행에 대해 인간적인 안타까움에 앞서 고소하고 샘통이라고 생각하며 겉으로 말하진 않는다 하더라도 즐거워한다. 그 이유는 소속감이 높을수록 상대편을 인간이 아니라 2차원적인 존재로 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내편이냐 아니냐의 문제다. 논리의 영역이 아니라 감정의 영역이다.


“1970년대에 헨리 타이펠과 동료들이 제일 처음 설명한 ‘최소 집단 패러다임'이라는 이 현상은 가치관이나 견해를 공유하지 않고도 한 집단을 형성하고 강경하게 그 편에 설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가치관과 견해 같은 건 나중에 맞추면 되는 것이다.


우리의 본성은 이성을 넘어서 남의 불행에 즐거워한다. 그래서 거북함이 생긴다.


“문화 이론가 애덤 코츠코는 거북함이란, 가치 체계가 서로 충돌해서 어떻게 혹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곤경에 처하는 아주 현대적인 현상이라고 말한다.”


'샤덴프로이데'라는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지 긍정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작가는 이것이 농담과 같은 것이어서 조지 오웰이 말한 ‘모든 농담은 작은 혁명이다.’를 빗대어 작은 혁명이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거 같다. 특히 이 책처럼 이런 감정의 사례들을 나열하는 것만으로 작가의 주장에 동감하기 어렵다.


박원순 시장의 죽음을 고소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는 것이 옳다.


- 이 책은 다산북스 서평 이벤트로 받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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