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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청년 Nov 07. 2020

내 안의 비겁함에 대하여

연을 쫓는 아이 - 할레드 호세이니

여기에 한 꼬마가 있다. 나의 하인이지만 너무나 순수하고 착하고 똑똑하며 당당하다. 거기에 비하면 나는 거짓말쟁이에 비겁한 사기꾼이고 도둑이었다. 아버지는 나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거 같다. 그 열등감에 그를 질투하고 괴롭힌다. 하지만 오히려 그는 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다. 그런 그를 모함하여 집에서 쫓아낸다. 나는 쓰레기다.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는 매년 연싸움 대회를 했는데 연줄에 유리가루를 묻혀 상대편 연줄을 끊는 것까지 우리와 똑같다. 잘린 연을 먼저 쫒아 가 잡는 아이가 그 연을 가지게 되고, 관습적으로 누구도 그걸 뺐을 수 없다는 것도 재밌다. 연싸움까지는 아니지만 나도 어릴 적 방패연을 직접 만들면서 우쭐해했던 적이 있다. 가오리연과는 달리 방패연은 균형을 잘 맞추지 않으면 날지조차 못하는 난이도가 있다.


주인공 아미르는 그 집 하인의 아들 하산과 같은 유모의 젖을 먹고 어릴 적부터 친구처럼 같이 자란다. 하지만 한 번도 친구라고 말해본 적은 없다. 아프가니스탄은 수니파인 파쉬툰인이 시아파인 하자라인을 지배하고 억압하고 있는 사회다.


한마디로 이 소설은 양심과 죄책감에 관한 이야기이다. 누구나 살아오면서 양심에 걸리는 일들을 하곤 하지만 자기 합리화를 통해 머릿속에서 지워버린다. 주인공은 평생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가다 30년이 지나서야 속죄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나도 폭력의 공포와 두려움에 당당히 맞서지 못하고 비겁하게 도망가거나 외면한 적이 있다. 이 기억은 불현듯 떠올라 나를 움츠려 들게 하고 소심하게 한다. 순간을 모면하려 하는 거짓말과 행동은 나중에 더 큰 문제로 돌아온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지만 머리보다 본능이 먼저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이 소설은 죄책감이 선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진짜 구원일지도 모른다고 위로하고 있다. 하지만 진짜 선은 죄책감이 들지 않도록 행동하는 것이다.


신영복 선생님의 책 ‘담론'에서 정말 열성적으로 운동하던 선배들은 졸업 후에 각자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지금도 운동하는 사람들을 보면 학생 때는 뒤에 있었지만 양심적인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그걸 보면 양심적인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걸 보면 맹자의 ‘성선설'이 맞는 거 같기도 하다. 양심은 누가 가르쳐주어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책을 본다거나 지식을 쌓는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다.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미국으로 망명해서 주유소에서 일하시던 아버지는 암으로 돌아가시고, 자기는 소설가로서 결혼까지 한 아미르에게, 어느 날 아버지의 가장 친한 친구 라힘 칸에게서 자신이 죽을 때가 됐다고 팔레스타인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는다. 다시 착해질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이 세상에서 가장 당당하고 존경스러웠던 아버지의 비밀을 듣고 엄청날 충격을 받지만 자신과 아버지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가 하산의 아들 소랍을 데려온다.


아버지 바바와 아들 아미르는 다른 듯 하지만 같다. 이상하게도 가장 닮기 싫은 부분만 닮는다. 나도 아버지의 가족에 대한 무심함이 싫었는데 엄마가 안부전화도 잘 안 한다는 섭섭함을 토로할 때 깜짝 놀란다.


이 소설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장면은 미국으로 소랍을 입양하여 데려가려 하지만 쉽지 않게 되고, 잠시 고아원에 맡긴다고 하자 소랍이 자살을 시도했을 때다. 소랍이 겪었을 참담함과 그 어린 나이에 죽음을 선택하려 했던 마음이 감정이입되어 울컥했다.


생각해 보면 주인공 아미르가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 소심하고 비겁하고 폭력의 공포에 당당하게 맞서지 못하고 피하기 일쑤다. 나는 저 정도까지는 아니야라고 위로받기 부끄럽다. 남은 인생 좀 더 부끄럽지 않고 당당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내 안의 비겁함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 준 작가에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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