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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청년 Mar 01. 2021

나도 그래, 하지만

일의 기쁨과 슬픔 - 장류진

장류진 작가는 2020년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에서 ‘연수'라는 작품으로 처음 접했다. 30대 엘리트 여성이 50대 노련한 아줌마에게 운전연수를 받는 내용인데, 마치 무림 고수가 제자와 밀당을 하는 듯한 심리묘사가 인상적이었다.


이 책은 총 8편의 단편이 모여져 있는 소설집인데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장강명 작가가 말했던 ‘월급 사실주의'라는 카테고리에 딱 부합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월급쟁이들이 느낄 수 있는 삶의 애환과 부조리가 정말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면서도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절제미가 있다.


첫 번째 단편 ‘잘살겠습니다'는 회사 동기이지만 나이 많은 빛나 언니와 결혼식 때문에 생긴 일들을 다루고 있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데 결혼한다고 하니 만나자고 해서 점심 샀더니, 커피값도 안 내고 결혼식도 안 오고 부주도 안 하는 염치없는 회사 동료가 또 자기 결혼식에는 오라고 한다. 회사 생활하다 보면 이런 사람들이 꼭 있게 마련이다. 주인공은 이런 상황에 열 받아하며 ‘세상은 주는 만큼 받는 거’라는 걸 가르치려 들지만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는 언니를 보며 당황한다.


세상은(아니 회사라는 사회는) 주인공이 생각하는 것처럼 주는 만큼 받는 세상이 아닌 것이다. 주는 사람은 계속 주고, 받는 사람은 계속 받는 세상이다. 두 사람은 같은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을 가르치는 건(소통하고 대화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둘의 차이는 한 끗 차이다. 부서이동에 관련한 메일에 전체 회신하려고 했던 자신 대신에 한 발 앞서 빛나 언니가 먼저 했을 뿐이다.


이 책의 표제작인 ‘일의 기쁨과 슬픔'은 판교 테크노벨리에 있는 ‘우동마켓'이라는 스타트업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다. 최신 개발 방법론인 애자일을 통해 매일 아침에 하는 스크럼은 사장만 얘기하는 조회시간이 돼버리고, 수평적 문화를 위해서 도입한 영어 이름은 나이 어린 사람을 하대하기 쉽게 변질되어 버린다. 서열 3위인 소위 천재 개발자라는 동료의 까칠함 때문에 속으로 분을 삭이면서 때론 울기도 한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고 해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 동네 중고 마켓’이라는 의미를 가진 우동마켓에 ‘거북이알'이라는 사용자가 등장하여 새물건으로 도배하다시피 게시물을 올리자, 조사하러 직접 만난 주인공은 카드회사에 다니는 사용자가 사장에게 밉보여 월급 대신 포인트로 받아서 생계를 위해 우동마켓을 이용한다는 사연을 듣는다.


포인트를 월급 대신 주라고 하는 사장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런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 같은 일반 회사원들과 사고 구조가 아예 다르기 때문에 그들의 논리나 행동에 의문을 갖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이라는 말에 왠지 공감이 된다.


이렇게 당하면서도 복수하거나 회사를 그만두지 못하고, 화해를 위해 선물을 준비하거나, 생계를 위해 포인트로 물건을 사다 판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세계에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현실의 부조리와 부당함을 보여주지만 판단하거나 계몽하지 않는다.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는 회사에서 좋아하던 여자 동료가 남편이 죽고 일본 후쿠오카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3년 만에 연락해서 찾아가는 얘기다. 혼욕이 가능한 노천 온천탕에서 벌어지는 성적 긴장감과 밀당이 재밌다. 여자와 한번 자보려는 남자의 본심과 잔꾀가 여자에 의해 들통날 때는 통쾌하기도 하다. 남자는 여자를 진심으로 좋아했다고 울면서 항변하지만, 마지막 '시발년'이라는 한마디에 그 추함이 드러난다.


다소 낮음'은 무명밴드 가수가 ‘냉장고 송'이라는 재미로 만들어 올린 동영상이 소위 말하는 대박이 나지만, 디지털 싱글 만들어 돈 좀 벌고 음반을 내자는 기획사 사장의 말을 거절한다. 여자 친구는 떠나고, 키우던 강아지도 죽고 아무것도 남지 않지만 본인은 편안해졌다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현실감각 제로인 남자 친구 곁에 남아있을 여자는 없을 것이다. 굴러들어 온 기회를 발로 걷어차 버리고, 두 달치 레슨비로 비싼 강아지를 사버리는 남자 친구. 앨범은 시디로 사서 전곡을 다 들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신의 꿈을 위해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다.


작가가 보기에 남자는 아닌 척 위선 떠는 욕망 덩어리이자, 자신의 알량한 원칙과 꿈을 위해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를 기회도 포기해버리는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도움의 손길'은 새로 아파트를 장만한 애기 없는 맞벌이 부부가 청소 도우미 아줌마를 들이면서 벌어지는 얘기다. 처음엔 프로의 손길을 감탄하면서 믿고 맡겼지만 점점 시간도 늦고, 대충대충 하는 모습을 보며 바꾸려 하지만 오히려 갑을이 전도되고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 든다.


결혼해서 아기 낳는 것이 필수는 아니지만 작은 집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와 비교하며 합리적이라고 말하는 모습엔 마음이 씁쓸했다. 회사에서 을의 위치에 있다 보니, 도우미를 쓰면서도 갑의 위치에 서는 게 낯설다는 건 많이 공감됐다. 직장과 마찬가지로 이 세계도 딱 돈 주는 것만큼 일하고, 오히려 그보다 더 조금 일하려고 하는 게 인지상정인데 가족 같은 마음을 기대하면 안 된다. 하지만 마지막 도우미 아주머니의 “주님 믿는 사람이라 거짓말을 못한다”는 대사는 압권이었다.


탐파레 공항'은 다큐멘터리 피디 지망생인 주인공이 아일랜드로 워킹홀리데이를 하러 가기 위해 경유지인 핀란드에서 90넘은 눈이 잘 안 보이는 할아버지를 만나면서 겪는 얘기다. 한국에 돌아온 후 그 할아버지에게 사진과 편지를 받았지만 생활고에 시달리다 보니 답장을 보내지 못하다 6년 만에 연락하고 살아계심을 확인한다.


다큐멘터리 피디가 하고 싶어 외주제작사에 취직했지만 잡일에 월급이 밀리고, 아버지가 쓰러지신다. 결국 작은 식품회사 회계팀에 입사하고 그때서야 핀란드인 할아버지에게 연락할 여유가 생긴다. 살다 보면 꼭 지켜야 할 약속이 이런 식으로 흐지부지 되어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더 늦기 전에 용기내야 할 텐데 그럴 수 있을까 싶다.


작가에게 있어 직장 생활이란 차별적이다. 여성은 능력이 뛰어나도 남성보다 월급을 작게 받고, 사장이나 동료의 횡포에 시달린다. 작가에게 있어 남자들이란 욕망 덩어리다. 남자들은 어떻게든 한 번 자보려고 여자에게 집적된다. 겉으로는 아닌 척 위선을 떨면서 자신의 욕망을 위해 성을 산다. 또한 자신의 꿈을 위해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다. 작가에게 있어 갑이라는 위치는 낯설다. 돈을 주고 도우미를 고용해도 쩔쩔맨다. 작가에게 있어 일을 한다는  꿈을 포기하고 생계를 위한 것이다. 그 대가로 해외여행을 꿈꿀 뿐이다.


이 모든 것이 가감 없는 현실 그대로의 모습이어서, 바로 내 모습이어서, ‘난 저 정도는 아니야’라고 면피할 수 없다. 여성이라면 직장인이라면 ‘나도 그래’ 하면서 많이 공감할 거 같다. 하지만 직장생활의 어려움에 대한 보상이 해외여행으로 귀결되는 것 같아 아쉽다. 그렇다고 대부분의 생계형 월급생활자들에겐 딱히 다른 답도 없으니 각자도생 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다른 곳에서라도 서로 위로할 동지를 찾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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