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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청년 Mar 05. 2022

우물 안 개구리들 세상

그냥, 사람 - 홍은전

얼마 전 상암에 있는 회사에서 퇴근하는데 전철이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경찰이 수십 명에 전철 안은 사람들로 꽉 차고 방송에선 '단체 장애인들의 승차 시도 때문에 지연되고 있으니 양해 바란다'는 방송이 계속되고 있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자 슬슬 짜증이 났다. 옆에 다른 전철이 오자 사람들은 그 차량으로 순식간에 옮겨 타고 장애인들은 경찰과 함께 기존 차량에 남겨졌다. 


사람은 데미안의 '아프락사스'처럼 자신의 알을 깨고 나올 수가 없다. 자신만의 우물 안에서 보이는 바깥세상만을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알을 깨고 나온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우물 안에서 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 다른 우물들에서 보는 각각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과 같다.


나의 우물을 처음 바라봤을 때의 느낌, 그 충격의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는다. 내 옆에 장애인이라는 우물이 있었지만 그동안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보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그들과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작가는 노들야학에서 장애인 지원활동을 하다가 그만두고 한겨레에서 칼럼을 쓰게 됐는데 그 글을 모아 이 책을 냈다.


‘나는 왜 쓸까?’라고 질문했을 때 내 답은 ‘사유(생각)하고 기억하기 위해서’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가끔 글 쓰는 나와 현실의 나는 좀 다른 게 아닌가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는데 작가도 그것이 가식적으로 느껴져 괴롭고 부끄러웠다고 고백해서 깜짝 놀랐다.


작가는 글쓰기는 ‘사랑했던 것들을 불멸화하려는 노력'이고 ‘글 쓰는 나와 현실의 나’의 차이를 줄여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이 힘든 글쓰기를 계속한다고 말한다. 맞다 제발 이 차이가 줄어들었으면 좋겠다.


이 책이 놀라운 점은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것들을 생각해 보게 한다는 점이다.


차별을 받으면 저항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복종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순리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한 번도 아니면 내 기억 속에서 그 입장에 서보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그냥 복종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의식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소록도에서 40년간 한센인들을 돌보았던 수녀님들의 봉사가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의 고통은 덜었겠지만, 덕분에 그 고통이 100년이나 지속되었다고 말할 때도 그랬다.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차별받는 사람들과 함께 사회운동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길인지 조금 안다. 하지만 알기 때문에 떠난다고 말하는 것에 공감하면서도 슬펐다. 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두려움이다. 작가는 ‘안다는 것과 감당한다는 것'에는 큰 강이 하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렇게 묵묵히 감당해 내는 사람들을 절대 욕하면 안 된다. 그래서 작가는 ‘알아야 한다’고 말하지 말고 ‘배워야 한다'라고 말한다.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실천의 부담감이 없어서일까? 이렇게 돌려 말해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해마다 300명이 넘는 홈리스와 천명이 넘는 무연고자들이 외롭게 죽어가는데, 집 없는 이들에게 주거비를 지원하는 데엔 26억을 쓰면서, 이들을 추방해 격리하는 수용시설에는 237억의 예산을 쓴다.” 이건 부조리다. 


“통장에 넣으면 재산으로 잡혀서 수급권 탈락해" 장애인이 기부하기 위해 10년간 매달 수급비 50만 원에서 20만 원을 현금으로 모아 기부금 2천만 원을 냈다. ‘어떻게 집에다 보관할 수 있지’라고 생각했는데 이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어이 없다.


작가는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것, 그것이 이 사회의 확고한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사회가 과연 좋은 사회일까? 개인은 조직이나 회사에 속해서 그 뜻이나 명령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데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고 보호해 주지 않는 사회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장애인 이동권만 해도 시위한 지 15년이 넘었지만 전철은 물론 저상버스 도입도 제대로 안되고 있다. 장애인 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 장애인 탈시설 운동 등 갈길이 너무 멀다. 장애인들이 ‘그냥 사람’이기 위한 길은 너무 더디고 오래 걸리기 때문에 문제를 제기하고 저항하는 사람들이 힘을 잃지 않도록, 지치지 않도록 적당히 몸 사리고, 비겁하게 오래 살아주길 바란다고 말하는 작가의 말이 뼈아프다.


작가는 굴욕은 내가 그 상황을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자각할 때 찾아온다고 말한다. 내가 생각했을 때 굴욕은 할 수 있음에도 용기 내서 할 수 없을 때 온다. 아는 것과 감당하는 것 사이에 있는 강이 너무 멀고 두렵게 느껴진다. 하나씩 알고 배워가는 거라고 생각해도 위로가 안된다. 글을 쓰는 과정이 이 차이를 줄이는 과정이라고 말해도 위로가 안된다. 그냥 마음속으로 지지할 뿐이다. 숙제다. 이런 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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