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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청년 Aug 28. 2022

인간은 문제를 해결할 만큼 현명한가?

노동의 종말 - 제레미 리프킨

사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나의 노동이 누군가나 기계 또는 프로그램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이 사실을 거부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 혹시 다른 사람은 그럴지라도 난 아니야, 난 아닐 거야, 나에겐 대체할 수 없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을 거야?


농업 자동화는 제조업을 발전시켰고, 제조업 자동화는 서비스업을 발전시켜 노동력을 흡수했다. 하지만 서비스업 자동화는 어떤 산업을 발전시켜 노동력을  흡수할 수 있을까?(이미 키오스크가 많은 인력을 대체하고 있다) 그런 새로운 산업은 떠오르지 않는다. it산업 같은 디지털 산업은 오히려 노동력을 덜 필요로 하게 만든다.(망했다)


이 책이 나온 90년대만 하더라도 기술혁명은 장밋빛 미래를 그려나가고 있을 때고, it산업은 진정한 디지털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기술혁명은 생산성 향상과 일자리 감소를 동시에 가져왔다고 말한다.


작가는 물질적 가치에서 시간 가치로의 전환이 인류사에 있어 획기적이라고 말하는데 기술혁명을 통한 생산성 향상이 노동시간 단축으로 이어진 사실을 중요하게 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현실은 편법이 판을 치고 있다. 알바 시간이 주당 15시간이 넘어서면 각종 수당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그 이상시키지 않고 여러 사람을 써서 돌리는 게 일반적이다.


작가는 제3부문이라 불리는 사회적 공동체 연대가 금전적 관계를 대체하고, ‘자신의 시간을 타인에게 주는 것’을 통해 기존 시장을 대체할 수 있다고 보지만, 작가도 밝혔듯이 정부의 지원이 절실하고, 내가 볼 때 일정 정도 지금의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을 뿐이지, 대체할 만한 산업으로서의 역량은 부족한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책의 주장에서 의미 있는 것은 하이테크 기술 혁명으로 인한 생산성 향상분이 공정하게 배분되지 않고 소수 기업에게 가고 있기 때문에, 양극화로 인한 격변이 일어날 것이다. 따라서 그 향상분을 어떻게 분배하느냐가 문제의 핵심이라는 통찰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본다.


기술의 열매가 커질수록 유토피아보다는 디스토피아가 나타나는 이유는 시장의 힘이 계속해서 생산과 이윤만 창출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런 자본주의의 맹점은 이미 잘 알려져서 복지정책 같은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현재 이루어지고 있다.


책 내용 중 인상적이었던 사례는 미국의 10대들이 벌써 자신의 죽음을 계획한다는 얘기가, 삶을 포기한 것과 같다는 정신과 의사의 말이다. 어린애들이 벌써 삶을 포기한 사회에 어떤 희망이 있을까? 내 주위에도 결혼과 연애와 육아를 포기한 사람이 많다. 이것이 의미하는 진실은 무엇일까?


문제는 기술혁명으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고, 오히려 노동의 종말 같은 문제들을 촉진시킬 것이라는 데 있다. 그래서 사회적 소득이라는 개념이 이미 60년대에 나왔고 지금은 기본소득이 이슈가 되고 있기도 하다.


 이상 자본주의로는 지금의 기후위기와 전쟁의 위협, 노동의 종말 같은 위협을 해결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아마 지금  세계가 쓰고 있는 국방비 경쟁과 기업 보조금만 많이 줄여도 문제의 상당 부분을 해결할  있을  같은데  못할까? 하는 걸?


이미 식량 생산량은 전 세계 인구를 먹이고 살리는데 충분하지만 회사나 나라의 이익을 위해 상당 부분이 바다에 버려지고 있다고 장 지글러는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에서 말한다. 이미 해결책은 있는데 자본주의 때문에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앞으로도 계속 자본주의는 유효한가? 대안은 서유럽식 복지사회가 맞는가? 아니면 미국과 같은 나라들은 복지사회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작가가 제안한 제3부문을 키울 수밖에 없는가? 인간은 이런 당면한 엄청난 문제들을 해결할 만큼 현명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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