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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청년 박재관 Feb 12. 2023

혐오는 공포를 먹고 산다

저주토끼 - 정보라 소설집

저주라고 하면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죽이기 위해 인형을 만들어 바늘로 찌르는 장면이 생각난다. 이 소설집의 표제작인 <저주토끼>는 젊을 때 억울하게 죽은 친구가족의 복수를 위해 저주물건을 만드는 할아버지 얘기다.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한다'고 할아버지는 말한다. 아름다움은 본능적으로 사람을 유혹하고, 유혹당한 사람에게는 치명적이기 쉽다.


이런 유혹은 <덫>에서는 덫에 걸린 여우가 황금 피를 흘리면서 다가오고, <즐거운 나의 집>에서는 결혼 7년째 되던 해에 겨우 빚을 다 갚고 8년째에 산 건물이다. 유혹에 빠지면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아이러니는 “남을 저주하면 무덤이 두 개”라는 일본 속담처럼 타인을 저주하면 자신도 무덤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소설은 잘 보여준다. 가장 무서운 건 저주가 반복되는 것이다. 여우가 “나를 풀어주시오" 할 때 바로 그 때, 풀어주지 못해 자기 딸이 똑같은 말을 하게 된다. 저주는 반복된다. 그러기 전에 저주는 나에게서 끝내야 한다.


저주는 혐오에서부터 시작한다. <머리>에서는 나에게서 빠진 머리카락과 배설물과 뒤를 닦은 휴지, 당신이 변기 속에 버린 것들이 ‘머리'로 변해 나에게 온다.


혐오는 공포에서 온다. <차가운 손가락>에서는 신혼집에 집들이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차사고가 났는데, 누군지도 모를 목소리에 끌려 따라간다. <몸하다>에서는 남자친구도 없는 대학원생이 생리가 멈추지 않아 약국에 갔더니 피임약을 먹어보라고 해서 먹었는데 임신이 된다.


공포는 전염된다. <흉터>에서 '그것'은 한 달에 한 번 소년의 뼈를 찢고 골수를 빨아먹는다. 괴물에 대한 공포 때문에 마을 사람들이 소년을 공양한 것이다. <재회>에서는 폴란드 광장에서 유령을 보는데 같은 유령을 보는 남자를 만나서 사랑에 빠지게 된다. “당신도 보여요?”


공포는 트라우마를 만든다. <재회>에서 남자 친구는 나치의 강제노동 수용소에 갔다가 살아 돌아온 할아버지와 엄마에게서 학대받는다. 커다란 외상을 겪어 일단 세상을 이렇게 극단적인 방식으로 이해하게 되면 이들을 고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왜냐면 생존의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모가 자식의 삶을 파괴하고 미래를 갉아먹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삶을 유지하고, 그것을 넘어 무리하게 확장시키려고 하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말한다. 이렇게 트라우마에 갇혀사는 모두는 과거의 유령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이 소설에서 작가가 말하고 싶은 핵심 같다.


<재회>에서 여주인공은 내 삶이 망가지고, 바닥이고,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지만 삶은 사랑한다는 시를 읊는다. 카라마조프 형제들에서 둘째 형 이반도 비슷한 말을 한다. 난 이 말이 처음에는 “현실은 죽을 만큼 괴롭고 힘들지만 그냥 밑도 끝도 없이 ‘삶을 사랑하기로 했다’라고 선언한 것 아닌가”라고 느껴져 싫었다.


읽을 당시에는 그랬다. 그냥 허무주의를 이쁘게 포장한 것 같았다. 지금은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끝없이 계속되는 현실의 괴로움과 고통 같은 저주를 끊기 위해서는 혐오를 멈추고, 공포를 극복해야 한다고, 그리고 나서야 삶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느껴졌다.


무슨 변화일까?

그동안 조금 성숙해졌나?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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